9월 24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정부 쿠폰 6천 원을 먹여서 단돈 1천 원에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편을 봤습니다. 한편은 <어쩔수가없다>이고 또 하나는 연상호 감독의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은 볼까 말까 했습니다. 집에 가서 프로야구나 볼까 하다가 평도 그런대로 좋고 1천 원에 볼 기회가 흔치 않기에 별 기대 안 하고 봤습니다.
그런데 전 <얼굴>이 더 좋았습니다. 아니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좋았습니다. 연상호 감독을 좋아했다가 최근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없는 영화들이 많아서 기대 안 했습니다. 넷플릭스 <계시록>은 끔찍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얼굴>은 <돼지의 왕>으로 절 팬으로 만든 연상호가 보였습니다. 드디어 초심을 찾았습니다. 연상호 감독이 잘하는 걸 다시 찾은 느낌입니다. <반도>, <염력> 같은 초능력이나 좀비물 말고 사회성 짙은 영화로 다시 돌아왔네요.
창의력 쩌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얼굴>

좋은 영화는 한 줄의 시놉시스 만으로도 홀리는 영화라고 하죠.
영화 <얼굴>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도장을 너무나도 예쁘게 판다는 형용 모순 같은 설정 자체가 놀랍고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이니다.
우리는 예쁘다 못생겼다를 시각으로 판별합니다. 그리고 예쁘고 못생겼다의 기준은 객관이 아닌 주관입니다.
사람마다 취향도 미의 기준도 다르니까요. 그런데 이 취향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주관이 아닌 객관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연예인이나 셀럽들이 추천하는 제품이나 좋다고 하는 걸 나도 모르게 좋아하는 경우도 참 많지 않나요?
그리고 친구나 주변 지인이나 가족이 좋다고 하는 걸 아무 판단 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잖아요. 하다 못해 뉴스도 남이 해석해 준 것을 마치 자신이 해석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보다 내 취향은 남의 취향에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걸 지적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런 어려운 주제를 이렇게 현시적으로 잘 보여줄 수 있다니 보면서 감탄사가 자동으로 나오더라고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얼굴 없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다

임영규(권해효 분)는 전각 장인이지 시각장애인입니다. 앞을 못 보지만 엄청나게 예쁜 도장을 파는 분으로 언론에도 자주 노출됩니다. 그러나 요즘 누가 도장을 파나요. 이에 아들인 동환(박정민 분)은 한 방송국 다큐 PD가 아버지를 방송에 내보내고 싶다는 말에 협조합니다.
아버지인 영규는 불편합니다. 별 걸 다 물어보고 촬영도 오래 하다 보니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들이자 매니저 역할을 하는 동환을 위해서 따릅니다. 그렇게 그날도 다큐 촬영을 하는데 한통의 전화가 옵니다.

어머니 정영희 씨가 죽었다는 경찰 전화를 받습니다. 사망한 지는 40년이 지나서 백골 사체라서 사망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신분증이 남겨져 있어서 연락을 했다고 하네요. 그렇게 40년이 지나서 장례식을 치루지만 어머니 사진이 1장도 없다 보니 영정 사진 없는 장례식을 치릅니다.
이때 경찰의 연락을 받았는지 어머니의 언니들인 이모 가족들이 옵니다. 이모 가족들은 유산 문제부터 거론하는 등 상당히 불쾌한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 사진 좀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너무 못생겨서 사진도 없고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바람피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면서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고 어린 나이에 도망쳤다고 하네요. 그리고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엿들은 다큐 PD인 수진(한지현 분)은 이게 더 흥미로운 이야기라면서 어머니의 과거를 아들 동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캐고 다닙니다. 피복 공장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 정영희의 직장 동료와의 인터뷰를 아들 동환과 함께 다니면서 어머니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다들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못생겼다고 괴물 같이 생겼다고요. 게다가 똥걸레라는 별명까지 말합니다. 자녀가 듣기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한 동료가 자신의 치부를 들춰내면서 어머니가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라면서 흐느껴 웁니다.
영화 <얼굴>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찾기 위해서 PD와 아들 동환이 과거 이야기를 들춰내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매불쇼에서 '거의 없다'와 '라이너'가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고 주장하는데 제가 보기엔 이 영화는 미치광희 최광희의 말처럼 드라마로 보이네요. 몇몇 결점이 있고 이야기가 너무 쉽게 풀어나가는 등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그게 영화에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은유가 가득한 놀라운 영화 <얼굴>

은유가 참 많은 영화입니다. 그중 몇 개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얼굴입니다. 영화는 어머니의 얼굴을 시종일관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으로 장애가 없지만 얼굴은 괴물 같이 못 생겼다는 소리만 하죠.
그럼에도 어머니가 결혼할 수 있었던 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인 영규와 결혼합니다. 역설적이죠. 얼굴이 못생겼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얼굴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이 논리를 야무지게 전복시킵니다. 안 보인다고 해도 예쁘다 못생겼다는 안 다는 겁니다. 자신의 도장이 잘 팔리는 것도 예뻐서 잘 팔리는 것을 알죠.
이게 충격적인 설정이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도 예쁜 아내를 얻고 싶다는 욕망. 이게 어디서 오는 욕망일까요?
그러고 보면 서두에 말한 우리의 취향은 우리가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미의 기준도 마찬가지겠죠.
그리고 도장입니다.
도장은 우리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우리가 우리임을 단박에 인증하는 수단은 얼굴입니다. 얼굴 보고 그 사람임을 바로 알죠. 그런데 우리 얼굴을 대신하는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도장입니다. 도장으로 우리는 각종 서류를 작성합니다. 요즘은 싸인이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도장도 많이 사용됩니다.
우리는 도장이 못 생겼다고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도장을 잘 파는 곳에 맡기려고 하죠. 뭐든 예쁠수록 다 좋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죠. 얼굴이 못생기면 못생겼다고 요즘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만 90년대 이전에는 흔하게 했고 성형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형의 시대가 되자 얼굴 지적이 확 줄었습니다. 얼굴은 사실 고윳값이죠. 못 생겨도 어쩌겠어요. 그게 정체성인데요. 다만 성숙한 사회는 그런 타고난 것을 손가락질하지 않지만 야만의 시대는 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입니다. 악인으로 나오는 피복 공장 사장은 악덕 사장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또 사진 마니아입니다. 사진은 기록성이 뛰어난 매체로 지금도 증명을 하려면 사진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증명사진이라고 합니다. 영화 <얼굴>은 나를 나라고 증명하는 도구인 도장과 사진을 통해서 나란 누구이고 얼굴이란 무엇이며 예쁘고 추한 것의 기준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90년대까지 이어지던 야만의 풍습

가끔 90년대까지 몽둥이로 개 패듯 패던 학교 풍경을 SF 소설로 아는 10,20대들이 있습니다. 제가 알잖아요. 선생님들이 복날 개 잡듯 팼어요. 어떤 선생님은 때리다가 지가 흥분해서는 풀 스윙으로 때리더라고요.
아직도 그 패던 선생님 중에 이름이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어요. 뭐 사랑의 매요? 웃기는 소리죠. 내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이 뭔 애정이 있어요. 그런 선생님이 일부라고요? 많았어요. 그리고 제가 80년대, 90년대 학교에서 사회에서 느낀 건 야만의 세상이구나, 정의나 도덕성은 교과서에만 있는 소리구나를 깨달았죠.
정말 돌아보면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야만의 시대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임영규는 더 심했죠. 솔직히 말해서 당시 어른들의 시선을 아직도 기억해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대놓고 병X이라고 하고 하등 국민으로 여기던 것들을 잘 기억합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오버할 정도예요.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할 정도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친구 먹고 싶은 건 장애인 마음이지 모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친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돈 좀 있다고 뻐기는 사장 놈들도 참 많았고 어리숙한 학생이면 더 벗겨 먹으려는 분들도 많았죠.
물론 선한 어른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학생이라면 사기 치려는 장사치들이 많았어요.
그런 야만의 시대를 정통으로 살아왔습니다. 영화는 이 야만의 시대에서 바른 소리를 하는 정영희라는 인물을 집어넣습니다.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오히려 욕보이는 시대. 그 야만의 시대를 조준 사격을 합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쏘와 붙이는 모습이 너무 좋네요. 물론 좀 과장된 면은 있어요. 어느 세상이나 악덕한 사람들만 이루어졌으며 그 사회는 돌아갈 수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좀 더 혼나야 하는 건 맞습니다.
초심 찾은 연상호 그리고 배우들

제작비 2억 원으로 만들었다고 하죠. 그래서 개봉 하루 만에 손익분기점 넘었다고요. 그런데 이건 좀 억지입니다. 박정민 등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하고 스텝도 최소 비용으로 책정해서 2억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배우들 출연료 제대로 쳐주었다고 해도 10억 안짝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0억으로 이렇게 잘 뽑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보면서 제작비가 많지 않아서 주로 실내 인터뷰나 비슷한 공간 촬영만 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저렴한 제작비 티가 안 납니다. 이는 이야기가 주는 힘이 워낙 좋다 보니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네요.
개인 사비로 만든 영화를 보면서 연상호 감독은 대작 영화보다는 이런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야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네요. <부산행> 이후 겉멋이 많이 들었는데 앞으로는 저예산 영화 많이 만들고 그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많이 전수해주었으면 하네요.
그리고 다시 느끼지만 영화의 뼈대는 시나리오입니다. 원작 웹툰이 워낙 좋다 보니 영화도 잘 나왔네요. 원작 웹툰도 연상호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을 칭찬 안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큐 PD 역할을 영악스럽게 잘한 한지현 배우입니다. 보면서 어찌나 얄미운지,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구슬리는 모습에서 역시 방송국 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권해효. 좋은 배우인 걸 알았지만 명연기를 한 영화나 드라마는 많이 생각나지 않는데 권해효 배우의 연기에 홀딱 반했습니다. 눈빛 연기가 엄청나더라고요. 감히 말하지만 박정민 배우도 연기를 잘 하지만 눈빛 연기는 권해효 배우가 더 낫습니다. 박정민이야 데뷔할 때부터 좋아했던 배우라서 따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임성재 배우도 얼굴 없는 역할을 한 신현빈 배우의 연기도 참 좋았습니다. 배우들의 힘이 참 좋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말이 좋으면서도 아쉬웠습니다.
연상호 감독이 대중성 높은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만들어서인지 결말 부분은 저 같으면 삭제했을 겁니다. 모든 판단은 관객에게 맡겼으면 했는데요. 대신 먹고사니즘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은 '니들이 아무리 양심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돈 앞에서는 똑같은 속물이야'라는 시선에 뜨끔했습니다.
얼굴은 못 생겼지만 불의를 보면 불같이 일어나는 여자와
앞이 보이지 않아서 온갖 괄시를 당했지만 더 큰 괄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바싹 엎드리는 살았던 우리들의 삶을 비판하는 힘이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추석 영화로 강력 추천합니다.
별점 : ★ ★ ★ ★☆
40자 평 : 얼굴을 통해서 야만의 시대와 우리들의 속물근성을 까 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