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은 <쓰리 빌보드>가 받았어야 했어. 이런 소리가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셰이브 오브 워터>도 좋은 영화지만 <쓰리 빌보드>가 더 좋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셰이브 오브 워터> 보다 좀 더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영화 <쓰리 빌보드>가 2배는 더 좋네요. 흥미롭게도 두 영화 모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의 허황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셰이브 오브 워터>과 형태의 편견을 담았다면 <쓰리 빌보드>는 뿌리 깊은 편견에서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시나리오를 가진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뒤통수를 제대로 한 방 맞았는데 영화 후반에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로 수시로 정신이 번쩍 들면서 동시에 장탄식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시나리오만 좋은 영화는 아닙니다. 이 놀라운 시나리오 위에서 열연을 하는 배우들이 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강력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분노가 3개의 광고판(쓰리 빌보드)에 표출되다

미주리주 외곽에 사는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몇 달전에 괴한들에게 딸을 잃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국도는 고속도로가 뚫린 이후에 차량들이 거의 지나지 않습니다. 이 길가에 3개의 방치된 거리 광고판을 봅니다. 밀드레드는 이 광고판을 보더니 1달에 5천달러나 되는 큰 돈을 내고 광고판을 사서 광고를 합니다. 이 광고판에 밀드레드는 딸의 수사에 책임을 진 월러비 경찰서장을 비난하는 과격한 문구를 넣은 광고를 합니다.  

이에 경찰서장 월러비(우디 해럴슨 분)과 그의 부하 딕슨(샘 록웰 분)은 크게 분노를 합니다. 이는 당사자인 경찰들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닌 마을 주민들도 월러비 경찰서장은 나쁜 사람도 아니고 딸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과도한 비난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밀드레드는 모든 마을 주민을 적으로 돌린다고 해도 경찰들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광고판을 내릴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무능력한 경찰과 맞서 싸우는 딸을 잃은 어머니의 분노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놀랍게도 단순한 구도의 영화가 절대로 아닙니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치과의사 손톱에 치과 드릴로 뚫고서 경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밀드레드의 과격함과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물증이 없으면 구속하지 못하는 경찰의 물증주의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밀드레드는 법을 존중하는 인물도 아닙니다.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서 위법 행위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자신을 비난한 광고판을 보고 밀드레드를 찾아간 서장은 이 동네에 사는 모든 남자들의 DNA를 구해서 범인 DNA와 비교해봐야 한다고 하는 밀드레드에게 그건 위법행위라 할 수 없다고 차분하게 설득을 하지만 밀드레드는 광고를 내릴 생각이 없습니다. 윌러비 서장은 자신이 암에 걸려서 몇 개월 살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그런 동정심 유발도 밀드레드에게는 먹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밀드레드가 냉혈한은 아닙니다. 경찰서에서 밀드레드를 조사하다가 윌러비 서장은 밀드레드 얼굴에 피를 뿜습니다. 깜짝 놀란 밀드레드는 사람을 불러서 서장을 병원에 보냅니다. 

밀드레드도 서장이 좋은 사람인 걸 잘 압니다. 밀드레드가 미워하는 것은 자신의 딸의 수사를 책임지고 있는 경찰서장의 자리이지 월러비라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자체를 미워한다면 월러비의 부하 딕슨 경관(샘 록웰 분)입니다. 마마보이이자 무능해 보이는 딕슨은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밀드레드의 과격한 광고판을 미워하지만 흑인과 경찰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밀드레드를 지지합니다. 딕슨은 흑인을 싫어하지만 자신의 상관을 괴롭히는 밀드레드도 싫습니다. 온 몸에 증오를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모습이 밀드레드와 비슷합니다. 


월러비 서장의 자살 이후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쓰리빌보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한 마을. 편견으로 서로를 증오하는 마음이 자욱히 깔린 시골 마을의 경찰 월러비는 암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함께 지켜보다가 죽느니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서 권총 자살을 합니다. 자살의 이유는 병 때문이지만 밀드레드 광고판이 준 고통도 무시는 못합니다. 그러나 밀드레드 광고판이 죽음의 1순위는 아닙니다. 

밀드레드는 1달 치 광고비를 냈지만 다음달 낼 광고비가 없어서 고민에 빠집니다. 이때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나서 한 달치 광고비를 대신 내줍니다. 누구일지 궁금해 하던 중 윌러비 서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밀드레드는 충격에 빠집니다. 이후 영화는 놀라운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영화 중반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마치 밀드레드와 월러비 서장이 체스를 두다가 중간에 체스판을 돌려서 상대방의 두던 체스판을 받아든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영화 끝날 때까지 이어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수시로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역지사지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서 우리가 가진 분노와 미움이 어디에서 왔는 지와 치유하는 과정을 박진감 넘치고 긴장감 있게 그립니다. 


우리안의 증오와 미움은 어디서 왔을까?

세상은 디즈니 애니처럼 선과 악이 확실하게 구분된 세상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악마 같은 상사도 집에서는 천사 같은 아빠입니다. 모든 것이 서 있는 언덕과 보이는 배경에 따라서 달리 보입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우리안의 증오와 미움의 이야기를 수려한 시나리오를 통해서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 <쓰리 빌보드>를 압축한 한 장면이 있습니다. 

밀드레드는 딸을 잃고 아들 로비와 함께 살아갑니다. 엄마의 과격한 행동에 아들은 창피해하다 못해 우울해 합니다. 남편은 19살짜리 여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습니다. 3개의 광고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전직 경찰인 남편은 밀드레드를 찾아와서 광고판을 내리라고 다그칩니다. 언성이 높아지고 남편은 식탁을 엎어버립니다. 이때 아들 로비가 식칼을 들고와서 아버지 목에 댑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막장 가족인가?라고 하는데 바로 식탁을 정리하고 다시 3명은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화목한 가정도 많지만 애증이 교차하는 가족도 많습니다. <쓰리빌보드> 영화 전체가 애증의 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밀드레드는 월러비 서장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딸을 죽인 범인을 잡지 못하는 그의 서장이라는 직책을 미워할 뿐이죠.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사람 자체와 직업인이라는 역할을 구분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구설수에 오른 연예인 기사와 직업인의 비리를 보면서 능력과 사람을 구분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냥 싸잡아서 비난을 하죠. 또한,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 원인을 차분히 분석해서 비난하기 보다는 편견을 앞세워서 가장 비난하기 쉽고 죽은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사람을 비난합니다. 

월러비 서장이 죽자 모든 비난은 밀드레드로 향합니다. 피해자 부모에서 하루 아침에 잠정적 가해자가 된 밀드레드. 언론도 태세전환을 해서 밀드레드를 공격합니다. 딕슨 경관은 더 적극적으로 가세를 합니다. 궁지에 몰린 밀드레드를 난쟁이와 흑인 등 소수자들이 도와줍니다. 이후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변경과 함께 소수자와 주류의 대결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 소수자 그룹에서도 또 다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는 등 대립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줍니다. 뿌리 깊은 미움으로 모든 관계들이 내편과 남의 편으로 구분됩니다. 이런 미움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발화되지만 인종차별이라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과 미움의 관계에서도 옵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증오의 세상을 입장 바꿔놓기를 통해서 스스로 이 뿌리 깊은 증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합니다. 

이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감독이자 각본가인 '마틴 맥도나'는 모든 캐릭터에 입체적으로 그립니다. 윌러비, 딕슨, 밀드레드, 광고업자 레드, 아들 로비 등등 모든 인물들을 하나의 성격 하나의 입장만 가진 단편적인 캐릭터가 아닌 2개의 입장이 공존하는 양가적인 태도를 가진 캐릭터로 만듭니다. 모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리다 보니 영화의 재미가 크게 증폭됩니다. 같은 사람을 다른 입장에서 만나고 다른 입장 또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면서 서로를 점점 이해하게 됩니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는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는다" 
정말 단순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난해만 해도 미국과 북한의 핵전쟁 운운에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북미간의 뿌리 깊은 증오심은 전세계에서 큰 우려를 나타낼 정도로 두 나라의 깊은 증오심은 극에 달했습니다. 증오와 미움의 끝은 파멸입니다.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멈춥니다. 아닙니다. 그 증오심은 또 대상을 찾아서 분출합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크던 작던 증오의 대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중 밀드레드와 딕슨이 가장 심합니다. 위법 행위도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증오심에 물들어서 하루 하루를 삽니다. 하지만 그런 증오심이 죽은 딸이 살아돌아오게 하지도 범인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증오심이 얼마나 자기파괴적인 행동인지 뛰어난 시나리오와 연기로 보여줍니다. 우리 안의 뿌리 깊은 편견에서 발화된 증오를 밀드레드와 딕슨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꽤 좋은 아니 걸작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 후반의 스토리는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다시 느꼈지만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에 받았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기와 시나리오 연출 모두가 만점입니다. 크게 보면 우리들의 삶을 담은 블랙 코미디 같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증오로 가득한 세상을 담은 거울 같은 영화입니다. 

별점 : ★★★★★

40자 평 : 3개의 광고판에 쓰여진 증오, 미움, 사랑

썬도그
하단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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