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리뷰/영화창고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세상을 고발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by 썬도그 2017. 5. 28.
반응형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도 없이 목수일을 하면서 혼자 살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는 심장병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병 때문에 일을 그만 두었으니 당연히 질병 수당을 국가에게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주치의가 심장병이 재발할 수 있다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에 다니엘은 쉬려고 마음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병 수당 심사관이 이상한 질문만 합니다. 

심장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보라고 하고 걷기 불편하지 않느냐는 등의 쓰잘덱 없는 질문만 합니다. 이에 화가 난 다니엘은 심사관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심사관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다니엘의 무례한 행동 때문인지 무성의하고 무능력한 심사관의 잘못된 판단 때문인지 다니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이 내려지고 질병 수당이 아닌 실업 수당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몰립니다.


영혼 없는 공무원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몰린 '다니엘 블레이크'

실업 수당을 받으려면 일정 시간 또는 일정 수준 이상의 구직 활동을 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실업 수당이 아닌 질병 수당을 받아야 하기에 질병 평가에 대한 항소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항소를 하더라도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금이 없는 다니엘은 실업 수당이라도 받으려고 하지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업 수당을 받으려면 인터넷에 접속해서 서류를 작성 해야 합니다.

마우스 움직이는 것도 모르는 나이든 다니엘은 인터넷 접수도 스스로 하지 못합니다. 보통, 이런 나이든 컴맹 분들은 공무원들이 도와주거나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영화 속 공무원들 대부분은 이런 다니엘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그건 니 사정이지 여기서 생때 쓰지 말라는 식으로 쳐다 봅니다. 

이 부분에서 큰 공감을 느꼈습니다. 지역에 있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아주 불쾌한 경험을 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내 항의와 지적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슨 불순분자 취급을 하더군요. 여러 관공서를 다녔지만 가장 불친절한 곳이자 불쾌했던 곳이 국민건강보험공단입니다. 어디 국민건강보험공단만 그러겠습니까? 많은 관공서들이 다니엘이 당한 것처럼 복지부동과 내 소관이 아니니 니가 알아서 싸돌아 다녀서 문제를 해결하세요 식의 행정 편의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제는 공무원들의 생리를 잘 알고 그들의 불친절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공무원들을 다스리는 법(?)을 나름대로 잘 알기에 언성을 높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답과 행동을 쉽게 이끌어 냅니다. 다니엘은 그런 영혼 없는 공무원들에게 화를 내지만 돌아오는 것은 경찰을 부르겠다는 위협이 돌아옵니다.


질병 수당 심사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원하는 질병 수당을 받지 못하고 실업 수당을 받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실업 수당을 신청하지만 구직 활동을 증명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자 실업 수당 마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연금도 없던 다니엘은 집안의 가구를 팔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갑니다.

어떻게 보면 한 공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한 저소득층 노인이 벼랑 끝에 몰리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공무원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복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몰린 복지 제도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복지 제도도 원칙만 외치면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공무원들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는 영혼 없고 융통성 없고 현실성 없는 공무원들의 무능 무신경 무지한 행동에 다니엘은 서서히 무너져 갑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공무원과 공공기관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데 이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는 많은 지자체 공무원들이 함께 관람을 하는 모습이 많았고 많은 공무원들이 반성이 계기가 되었다는 뉴스 기사가 많네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모든 공무원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집단이나 악인과 함께 선인이 공존합니다.


악의 세상에도 선인들로 인해 살아가게 되는 세상

다니엘 블레이크 할아버지 입장에서 세상 아니 정확하게 정부가 쳐 놓은 복지제도는 악입니다. 컴맹인 노인들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불편함을 호소하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을 가합니다. 이런 악은 다니엘에게만 보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런던에서 다니엘 옆집으로 이사를 온 캐티(헤일리 스콰이어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리를 잘 몰라서 몇 분 늦게 관공서에 도착했는데 몇 분 늦었다고 무자비하게 유일한 생활비인 생계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캐티는 다니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2년 동안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다가 다니엘이 사는 뉴캐슬로 이사를 왔습니다. 


캐티는 생활 보조금을 받아야 하기에 관공서에 읍소를 하지만 단 몇 분 늦은 것도 늦은 것이라면서 원칙만 강조하는 공무원 앞에서 무너집니다. 이를 지켜보던 다니엘은 무자비한 관공서 공무원에게 항의를 하지만 모두 함께 쫓겨납니다. 그러나 같은 아픔을 겪어서 그런지 캐티와 다니엘은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아이가 없는 다니엘에게는 캐티 가족은 하나의 대체 가족이었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지 못한 캐티에게 다니엘은 할아버지의 푸근함 품이였습니다. 그렇게 캐티 가족은 다니엘의 온기로 굳건하게 살아갑니다. 가스와 전기세 낼 돈도 없어서 냉골에서 지내는 걸 안 다니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캐티에게 힘을 내라고 말해줍니다. 

캐티는 방통대를 다니면서 재기를 꿈꾸지만 여간 쉽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함꼐 식료품 배급소에 가서 다양한 생필품과 식료품을 비닐 봉투에 넣다가 갑자기 캐티가 깡통을 따서 허겁지겁 마십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차분하게 캐티를 앉히고 천천히 먹으라고 합니다. 캐티는 며칠을 굶고 있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깡통을 따서 먹었는데 이 장면은 눈물 없이 볼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알 수 없는 배고픔은 최악의 상황이 되어서야 우리 앞에 드러납니다. 

캐티는 늪에 빠진 것 같다면서 다니엘 앞에서 흐느낍니다. 이런 캐티를 또는 다니엘을 도와주는 선한 의지가 가득한 선인들이 캐티와 다니엘을 도와줍니다. 공무원 중에서도 선한 공무원이 다니엘의 난처함을 지켜보다가 도와줍니다. 또한, 다니엘의 이웃 흑인 청년은 진심으로 다니엘을 걱정합니다. 이런 다니엘은 또 캐티를 걱정하고 보살펴줍니다. 집안 수리도 돕고 정서 불안을 느끼는 캐티의 어린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됩니다. 

이런 선한 사람들이 신발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캐티의 딸을 놀리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 사람을 숫자나 돈으로 보는 천한 악인들이 가득한 세상의 파고를 넘는 등대 또는 구명 보트가 되어줍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절대로 어려운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극장이나 KBS의 동행이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떤 삶이 바르고 바람직하고 옳은 삶인 지를 자연스럽게 안내해 줍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진 세상을 고발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

다니엘이 캐티 가족에게 보여준 온기는 다니엘이 어려운 처지에 놓을 때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온기가 사라지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게 되면, 다 잃게 된 거예요" 이 대사는 이 영화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시스템과 제도는 잘 마련되어 있는 나라이지만 그 도움을 사람의 자존심까지 건드리게 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캐티처럼 열심히 살고 노력해도 이 깊은 가난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결함의 피해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욕 보이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모습을 영화는 차분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 할아버지는 세상에 딱 한 번 항거합니다.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눈물 없이 볼 수가 없습니다. 딱한 이웃을 돕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았는데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지를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영화 제목이 특이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간단 명료한 제목은 그 자체로 영화의 메시지가 됩니다. 내 이름을 당당히 말하고 내가 나라고 당당할 게 말할 수 있는 인간 존엄이 확립된 세상을 다니엘 할아버지는 꿈을 꿉니다. 영화는 흥행 영화의 코드인 서푼짜리 희망을 심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이 자체가 더 큰 희망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네요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습니다. 덕분에 이 영화로 인해 전 세계 많은 공무원들이 반성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니엘이 울분이 우리 보다는 공무원들에게 향한 외침이었고 전 세계 지자체와 정부가 이 영화를 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그림이 이 영화가 영화로 끝나지 않고 세상 변화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 지를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영화입니다.


별점 : ★★★★
40자 평 : 인간 존엄을 지켜주는 밝은 사회에 대한 다니엘 할아버지의 쓴소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