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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T월드

나는 왜 슬로우TV에 빠졌는가?

by 썬도그 2017.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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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일에 지쳐서 거대한 불쾌한 냄새가 가득한 쇠덩어리인 전철에 몸을 싣고 집에 도착하면 긴 한숨을 쉬게 됩니다. 이러려고 사는 건가? 이게 사는 것인가? 연명하는 삶 아닌가? 라는 질문 속에 지쳐서 잠이 듭니다. 제 페이스북을 보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요즘 가족이 하는 사업 도와주느라 블로깅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글은 쓰지만 예전 같이 많이 쓰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이 점점 황폐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지난 일요일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패잔병처럼 거실 쇼파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TV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TV를 보면 피로가 풀리기 보다 자극적인 영상들이 많아서 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동공이 풀린 채로 멍하니 있다가 오랜만에 TV를 켰습니다. 역시나 TV는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30년 넘게 TV에 열광한 저입니다. TV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군대에서도 TV 중독자라고 고참에게 혼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TV를 거의 안 본지 5년이 넘어가네요. 

TV를 줄이니 좋은 점이 참 많습니다. 그중 가장 좋은 점은 TV보는 시간에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다양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거실의 TV를 켰습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TBS 채널에 멈췄습니다. 봄이 오는 섬진강 매화마을을 촬영한 여행 영상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여행 영상물과 다르게 나레이션도 없고 음악은 가끔 나옵니다. 무엇보다 영상 1컷이 5분 이상 10분까지 이어지는 롱테이크로 촬영했습니다. 정지한 영상 또는 이동 영상도 걸음 걸이 속도로 촬영한 영상이었습니다. 무심결에 본 이 슬로우TV를 무려 1시간 넘게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영상을 보면서 느낀 것은 마치 내가 섬진강 매화마을을 걷거나 쉬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좋다!를 연발하면서 한 참을 봤네요. 


휴식을 느끼게 해주는 슬로우TV에 빠지다

슬로우TV의 원조는 노르웨이 NRK 방송사입니다. 2009년 '베르겐 기차여행'이라는 TV에 방영했습니다. 이 방송은 베르겐으로 향하는 기차 앞에 카메라를 설치한 후 촬영한 영상을 무려 7시간이나 보여줬습니다. 정말 단순한 영상입니다. 또한, 편집도 음악도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CCTV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TV프로그램을 누가 볼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놀랍게도 노르웨이 전체인구의 30%가 이 '베르겐 기차여행'을 봤습니다. 한 노인은 이 슬로우TV를 보다가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역에서 내리려고 거실에서 가방을 찾았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뭐가 이 슬로우TV의 인기를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무자극 영상 때문이 아닐까요?

몇 년 전에 전국 백두대간을 자동차를 타고 돌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행을 돌이켜보면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본 가을 풍광이 많이 기억나네요. 우리가 여행을 할 때 여행지의 랜드마크를 보는 것도 짜릿하지만 그걸 보러 가는 여정도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기차로 이동할 때 흘러 나오는 창 밖 풍경은 여행의 풍미를 더 돋우어 줍니다. 

슬로우TV는 그 여행의 재미를 전혀 가공하지 않은 영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 7시간 짜리 영상은 기승전결도 크라이막스도 짜릿함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일상 또는 우리가 보는 세상을 그대로 TV에 담아서 보여줬습니다. 짜릿함은 없지만 반대로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보다 보면 내가 진짜 기차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듭니다. 


다양한 슬로우TV


슬로우TV를 무엇이다고 딱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략적으로 긴 상영 시간을 한번의 편집도 없이 롱테이크로 촬영한 영상물로 주로 자연 풍경이나 기차 여행 또는 해변가의 파도소리나 계곡의 물소리와 빗소리 등을 1시간 이상의 긴 시간동안 담은 영상물을 슬로우TV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토바이에 고프로 액션캠을 달고 도시나 도로를 질주하는 영상은 힐링이라는 개념이 약해서 슬로우TV라고 하긴 좀 어렵죠. 슬로우TV는 무자극 영상물이자 사람에게 평온한 느낌을 주는 영상입니다. 또한, 계속 본다기 보다는 틀어 놓는다는 개념도 많습니다. 특히 계곡가 바닷가 숲속 트래킹을 담은 영상들은 계속 지켜보기 보다는 자연의 소리인 파도소리, 새소리, 물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와 기차의 덜컹거리는 바퀴소리 같은 화이트 노이즈를 들으면서 업무나 다른 일을 하는 배경음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슬로우TV 영상물을 틀어 놓고 그 앞에서 대화를 하는 분들도 많다고 하죠. 어떻게 보면 근 미래를 담은 SF영화에서 벽 전체가 디스플레이로 되어서 버튼만 누르면 숲속, 사막, 호숫가 등의 화면이 펼쳐지는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배경화면이라고 할까요?

유튜브에 슬로우TV라고 검색을 하면 실로 다양한 슬로우TV 영상물들이 있습니다. 각 영상들은 엄청난 조회수와 좋아요 비율이 무척 높습니다. 이걸보면 저만 슬로우TV에 빠진 것은 아니네요. 왜 이런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영상물이 인기를 얻을까요? 그건 바로 우리들의 시끌복잡한 삶 때문입니다. 

도시는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받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풀다보면 몸은 점점 나빠집니다. 도시의 독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자연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산이 참 많습니다. 버스타고 갈 수 있는 산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산에 갈 시간도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행을 꿈도 못꾸는 사람들도 많죠. 그런 분들에게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것이 슬로우TV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극적인 영상물에 지친 사람들이 저자극 또는 무자극 영상물을 통해서 평온함을 느끼기에 슬로우TV 인기는 서서히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온 아닐까요? 매일 매일 자극과 스트레스의 연속인데 이런 평온함을 재생 버튼만 눌러서 얻을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입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슬로우TV 영상물에 빠져서 간단한 글이지만 무려 6시간 이상 걸렸네요. 그럼 이만 글을 줄이고 다시 슬로우TV에 빠져야겠습니다. 이 슬로우TV는 기술적 발전의 영향도 있습니다. 요즘 HD급이 기본이고 풀HD급과 4K 영상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풀HD이상의 뛰어난 해상력의 영상을 보면 보다 현실적으로 느끼기 때문이죠. 

슬로우TV, 급하고 바쁘게 사는 우리들을 잠시 쉬게 하는 쉼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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