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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촌의 풍경을 담은 서울역사박물관의 신림동 청춘 전시회

by 썬도그 201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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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작년 가장 황당한 사건은 이 블로그에 고시원을 사진으로 담은 사진전을 소개했는데 갤러리 관장님이 메일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고시원에서 고시원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면서 글을 삭제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죠. 사진에 담긴 그 고시원인가요? 아니라고 하네요.

황당하네요. 사진에 찍힌 고시원도 아닌데 단지 고시원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담았다고 글 삭제해달라는 것은 무례를 넘어서 주제 넘는 행동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블로그에 그 식당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나 맛이 없다고 쓰면 포털에 신고해서 포스팅 블럭 처리하는 것이 요즘 풍경입니다. 



요즘 고시원은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도시에서 밀려 나지 않기 위해서 좁디좁은 방에서 기거를 하는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고시텔 앞을 지나가면 새벽 1시에도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술과 담배를 하는 고시텔 거주자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제는 고시원에 고시생이 없는 그냥 저가 숙박시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시원의 원조는 '신림동 고시촌'입니다. 그 신림동 고시촌의 일상을 ㄷ감은 '신림동 청춘'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9월 11일부터 11월 8일까지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신림동 고시촌은 개인적인 사연도 살짝 있습니다. 제가 이 고시촌에서 고시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고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동아리 동기가 이 고시촌에 살았습니다. 집도 근거리라서 가끔 집 앞까지 바래다주곤 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사는 곳에서도 그리 먼 곳이 아니라서 자전거를 타고 서울대를 갈 때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죠.

그때는 고시촌인 줄도 몰랐습니다. 다만 신림 9동 녹두거리라는 것만 알았죠. 
이 고시촌이 형성된 것은 서울대가 동숭동에서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오기 전부터 형성되었습니다. 움막을 짓고 그 안에서 책을 팠던 고시생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렇게 고시촌은 관악산 자락에서 서서히 퍼지다가 서울대가 1975년에 관악산 캠퍼스로 옮기면서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그렇게 신림 9동 일대는 고시원들이 많이 사는 고시원이 늘어나면서 고시촌이 됩니다. 



신림동이 인기 높은 고시촌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서울대가 가깝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겠죠. 분명 고시촌이 먼저 생겼지만 고시촌이라는 마을 단위가 된 이유는 서울대가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물가가 싼 것도 무시 못하죠. 




전시회 장소는 아주 컸습니다. 다만, 신림동 고시촌 하나의 콘텐츠로 이 공간을 다 치장하는데는 약간 버거운 느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시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다시 신림동 고시촌 이야기를 해보죠. 이 신림 9동은 신림 4거리에서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버스 타고 도림천을 따라서 한참 올라가야 합니다. 어쩌면 서울대 인근 상권이 더 어울리죠.  이 신림 9동에는 불법 복사집이 꽤 많았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네요




고시촌은 공동 식당이 있었는데 뷔페식 식당이라서 음식 취향에 맞게 골라 먹으면 됩니다. 가격도 싸서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고시원들에게 큰 도움을 줬습니다. 그러나 물가 때문에 고시촌 식당들도 하나 둘 씩 폐업을 하고 있네요. 가장 큰 이유는 이 고시생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고시생의 책장을 그대로 재현했네요. 전 이 책상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건 바로 고시생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생각이었죠.

한국 아니 동북아시아 3국은 배움 = 암기라는 인식이 무척 강합니다. 
서양 같이 문제를 제시하고 그걸 풀어가는 창의력을 테스트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지식을 머리에 다 때려 넣고 그걸 누가 빨리 꺼내서 적거나 누가 많이 머리에 때려 넣였냐의 대결이죠. 마치 지식을 전자계산기나 컴퓨터처럼 정보를 누가 많이 머리에 넣느냐의 대결입니다. 


이런 식의 지식이 제대로 된 지식입니까? 특히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만나서 거대한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쉽게 검색해서 취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아직도 법률 관련 서적과 상식 관련 서적을 머리에 다 때려 넣고 그걸 테스트하고 통과 시키는 사법시험 제도가 과연 합리적일까요? 

그런 지식 대결이면 노트북이 더 빨리 찾고 정확하게 찾죠. 


저걸 머리에 다 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기본적인 지식은 있어야죠. 개념은 가지고 있어야겠지만 저걸 머리에 다 넣고 시험을 보는 것은 합리적인 것 같지 않네요.



현재의 고시 시스템의 문제는 오로지 공부만 해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외교관이 되려면 무엇보다 인성이 중요합니다. 공직자의 기본 덕목은 공명심입니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오로지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문제죠.

좀 비판적으로 보자면 요즘 판사, 검사, 선생님, 외교관들의 부정부패와 부도덕함 이면에는 반듯하지 못한 인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반듯한 인성을 갖추려면 오로지 공부만 하지 않고 사회 활동, 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회 활동을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죽어라 공부만 하는 시스템은 많은 병폐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시촌 괴담들이 나오는 것이고요. 공부만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은 고시생들이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고 미치는 사람도 있나 보네요. 어제도 신림동 고시촌에서 대낮에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살인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 아닐까 하네요.




고시생들이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잠시 포기하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암기식 공부는 사라져야 합니다. 
한국은 이 검사, 판사, 변호사, 선생님 같이 고시를 통과한 사람들이 깨끗해야 하는데 그렇게 깨끗하지 않는 게 참 문제네요. 



그나마 이런 고생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하는 신분의 사다리 역할 때문에 세상을 정화 시키는 것도 분명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학도 안 나왔지만 고시를 통과해서 대통령까지 되었죠. 분명 고시는 개천에서 용 나는 가장 위대한 황금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와서 사회 밑바닥층의 애로사항과 그들의 고충을 잘 귀담아 듣는 판,검사가 세상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판,검사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은수저 이상의 집안 출신이 많다고 하죠.

그래서 한국 사회가 점점 혼탁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언제 합격될지도 모르는데 어느 집안이 매달 137만원의 고시 비용을 수년 간 낼 수 있어요? 
제 친척 중에 작년에 임용고시 합격한 분이 있는데 수년 간 임용고시 뒷바라지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더군요. 임용고시가 이럴진데 사법고시는 어떻겠어요. 고시 준비 하다가 비용 때문에 고시 생활 포기하는 흙수저 집안 출신 고시생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런 병폐 죽 암기로 지식을 습득하는 법조인 양성을 탈피하기 위해서 노무현 정부는 미국식 제도인 로스쿨 제도를 도입합니다. 로스쿨 제도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법학 전문대학원인 로스쿨에 입학해서 3년 간 과정을 이수하면 변호사자격시험을 받을 수 있는 응시 기회를 줍니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암기식 지식을 습득한 메뉴얼만 달달 읽은 법조인 양성은 탈피해야죠. 현실과 법의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법만 파면 메뉴얼 인간인 고지식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로스쿨 제도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 가장 큰 비판은 동수저, 은수저, 금수저들만 사법고시 통과한다는 비판이죠. 그렇지만 로스쿨 제도 이전과 이후의 개천에서 용 난 즉 흙수저가 사법고시 통과한 %를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로스쿨 제도 이전에도 동수저 이상인 사람들이 사법고시 통과를 잘 했습니다. 오히려 로스쿨 제도는 강제적으로 7%를 흙수저의 입학을 허용하고 있는데요



사법고시 제도의 문제점은 정말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들이 한국을 쥐락펴락하니까요. 필부필부의 행동 보다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행동이 세상에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시촌은 몰랐지만 녹두거리는 압니다. 여기서 술 가끔 마셨던 기억이 나네요. 


신림동 청춘 전시회는 고시촌 이야기를 지나 신림동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신림동은 부심권이라고 조금은 애매한 그러나 신림동 순대타운 등의 번화가가 많았습니다. 20,30대 때 정말 신림동에서 많이 술도 마시고 쏘다닌 기억이 나네요. 

이 신림동에 친구가 참 많이 살았습니다. 지금도 신림동은 유동인구가 참 많은 곳이죠.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도 이에 못지 않게 번화가가 되었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신림동은 술 먹기 좋은 곳이였죠. 이 신림동은 박정희 정권이 시내에 있는 판잣집들을 경고장 하나 날리고 다 때려 부셔 버리자 난민과 같은 사람들이 신림동이나 시흥동 일대로 이주합니다. 청계천, 용산 해방촌, 이촌동, 대방동에 살던 철거민들이 신림동 난곡과 시흥동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난곡은 무허가 건물인 달동네가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싹 밀고 아파트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시흥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이런 식의 개발을 하면 난리 나죠.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의 법은 공익과 국익을 위해서라면 개인 소유의 건물과 땅을 강제로 매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만도 못한 법입니다. 중국은 최강의 알박기 신공이 허용되어서 해외 화제에 오르기도 하는데 한국은 국가가 도로 낸다면서 아파트 짓는 다면서 개인의 토지와 건물을 강제로 매입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는 그냥 서울에서 나가라고 지목하면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로 밀려나가야 했습니다.


철거민들은 그렇게 서울 외곽으로 밀러 났습니다. 



이 신림동에 1975년에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생깁니다. 어렸을 때 참 궁금했던 것이 연대, 고대, 이대 등은 다 서울 중심에 있는데 서울대는 왜 외딴 관악산 자락에 있나? 했네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 이 관악구나 구로구 금천구에는 대학교가 없거든요. 그 흔하고 많은 대학교가 없는 곳이 서울 서남부입니다. 뭐 강남에도 이렇다 할 대학교가 없고 대학교라는 곳 대부분이 강북에 있긴 하지만 이 서울 서남부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1위 대학 그것도 엄청나게 큰 건물이 들어선 것이 이해를 못했는데 1975년 동숭동에서 이주해 온 것이네요

이 서울대학교는 일제 시대에는 경성대학교였고 그래서 여전히 친일을 외치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네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서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일제시대를 추억하는 말을 자신의 제자도 아닌 서울시민 앞에서 하는 모습이 생생하네요


그럼에도 바른 정신을 가진 대학교수도 많고 학생도 많습니다. 이 서울대를 수년 전에 싹 돌아봤는데 캠퍼스가 캠퍼스가 이건 뭐 다른 대학교 한 3개를 합친 이상의 큰 규모입니다. 평지가 아닌 것이 짜증 나지만 정말 엄청나게 큰 캠퍼스입니다. 

중,고등학교 자녀들을 데리고 한 번 정도는 근처에 있는 대학교를 데려가 보는 것도 공부에 대한 향상심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히 서울대 구경해주는 것이 공부의 목적성을 좀 더 부각시켜주는 역할도 할 거예요. 


80년대 서울대 정문 앞에서의 거대한 시위 풍경도 담겨 있네요




신림동 청춘은 신림 9동의 고시촌을 집중 조명한 전시회입니다. 한 명만 겨우 누울수 있는 고시원이 마치 벌집 같아 보이네요. 어떻게 보면 더 큰 세상을 나가기 위해서 잔뜩 움츠러든 모습 같기도 합니다.  문제는 저 고시원 생활을 탈출하는 것이 아닌 저기서 번데기가 되어가는 청춘들이 늘고 있습니다. 

젊은 것이 재산이 아닌 젊음이 착취의 대상이 되어가는 한국이 요즘 풍경입니다. 


관악구는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지역인데 이게 다 고시원 때문인 듯 하네요. 이 고시원이 꼭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이제는 가장 싼 자취방 역할을 하니까요. 


추천하는 전시회는 아니지만 고시라는 황금 사다리를 통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전시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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