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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맥락 파괴의 서사가 사진의 맹점과 닮은 영화 <시간의 언덕>

by 썬도그 2015.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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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 팬이 되었습니다. 1996년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본 후 영화는 재미있게 봤지만 딱 지루한 예술 영화 스타일이라서 쭉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옥희의 영화>를 본 후 이 감독은 여전히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구나 느끼면서 그의 영화 작법에 점점 빠져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좋은 점은 지성인이라고 잘난 척 하는 것들의 속물 근성을 제대로 까발려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흔한 우리 주변의 풍경인 불륜과 내 안의 속물 근성을 숨기지 않고 가감없이 그대로 담는 다는 것이죠. 이런 인간 비판적인 시선이 참 마음에 들더군요. 이후 쭉 지켜봤습니다. <우리 선희>도 3명의 남자가 선희라는 여대생에 대한 탐욕의 코메디가 너무 웃기더군요. 

그러나 홍상수 감독의 최신작품인 <시간의 언덕>은 보지 못했습니다. 시간도 되지 않고 좀 끌리지도 않더군요. 그런데 이 영화가 작년에 영화 평론가들이 뽑는 한국 영화 10편 중 한 편이기도 하고 끌리지는 않지만 다음 작품을 위해서 뒤늦게 챙겨 봤습니다. 


시간이 뒤죽박죽 된 서사가 주는 흥미로움

이 영화는 서사가 아주 독특합니다. 서사가 시간의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서사가 편지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2년 전에 한국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을 했던 일본인 모리(카세 료 분)은 사랑을 넘어 존경하는 권을 찾아서 서울에 다시 찾습니다. 권이 살던 북촌에 방을 잡은 모리는 매일 권이 살던 집에 찾아가지만 권은 병치료 대문에먼곳으로 떠났고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렇게 권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면서 모리가 권에게 쓴 편지를 권이 읽으면서 영화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권이 이 13장이나 되는 편지지를 계단에서 떨어뜨렸고 책과 달리 페이지 숫자가 없어서 권은 이 편지를 뒤죽박죽인 상태로 읽게 됩니다.

영화는 그렇게 모리가 권을 기다리면서 서울 북촌에서 지낸 1주일의 시간이 섞이면서 보여집니다. 영화 자체는 시간 순으로 촬영을 하고 편집 과정에서 편지처럼 막 섞었다고 하는데 이런 방식은 아주 신선합니다.


이렇게 일주일이라는 과거의 시간을 섞으면 어떤 효과가 나올까요?
그건 사진의 효과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시간 순으로 받아들이고 시간 순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해야 원인과 결과를 잘 알 수 있고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이 가진 맥락의 힘이 이야기의 힘이죠. 그런데 이걸 이야기를 잘게 잘게 쪼개서 바닥에 뿌려 놓고 퍼즐처럼 맞추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조각을 들고 다음 조각을 보고 이게 이 조각의 어떤 부분인지 추측을 하면서 결국 직소 퍼즐을 완성하게 됩니다. 

사진은 맥락의 힘이 약한 매체입니다. 사진은 순간만 기록하기 때문에 그 사진 하나로 어떤 사건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진은 그 맥락을 캡션이라는 텍스트로 설명을 합니다. 반면 동영상은 시간을 순차적으로 담기 때문에 (편집 하지 않은 영상) 사건의 맥락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모리가 권을 기다리면서 생긴 사건 사고는 많지 않습니다. 한옥 민박집에서 조카라는 사람과 서울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술을 마시는 모습과 함께 카페 여주인인 영선(문소리 분)과의 관계가 전부입니다.


권을 기다리면서 영선의 친근함에 빠져서 그녀에게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끌림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남자 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건지 포기한건지 이 영선과의 관계까지 편지에 다 적습니다. 

좀 또라이라면 또라이고 순진하다면 순진합니다.  민박집 주인 말처럼 솔직한 모리입니다. <자유의 언덕>은 이렇게 어떤 이야기를 조각내서 막 섞어서 전해주는 독특한 형식미가 꽤 좋긴 하지만 스토리가 딱히 끌리는 것도 없고 이전작과 달리 지성인들의 허세와 구라질이 많이 사라진 것은 참 아쉽네요



대신 홍상수 특유의 시니컬은 외국인에 대한 시선으로 향합니다. 
한국 기자들이 외국 스타가 오면 하는 질문이 있죠.  

"한국의 첫 느낌은 어떻습니까?"
"싸이 아세요?", "김치 먹어 봤어요?"

참 저질 질문들 입니다. 우리는 외국인을 만나면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면 일본인들의 일반적 성향을 말합니다. 일본인들은 예의 바르고 정직하고 깔끔하다라는 말을 툭 꺼내요. 그리고 너도 일본인이니 그러겠지라는 무리한 일반화에 처음 본 사람을 껴맞춥니다.

민박집 여주인의 이런 질문에 까칠한 모리는 꼭 그렇지 않다면서 그런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핀잔을 줍니다.
일반화의 오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 모든 사람을 일반적인 성향과 기질에 껴맞추고 그 일반적인 성향과 다르면 다르다고 말하고 같으면 역시 일본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성격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저질 질문을 외국인들에게 참 잘하죠. 영화 <자유의 언덕>은 이런 외국인을 향하는 우리의 고리타분한 시선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모리는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 다닙니다. 영선은 그런 모리의 책에 관심을 보입니다.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죠. 그런데 시간이 기억이 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과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 기억 속의 과거를 잘 들여다보면 과거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억이라는 우물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막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리면 어떤 기억이 어떤 기억에 앞서는 기억인지 바로 기억해내지 못하죠. 

이는 기억이 점점 휘발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억의 왜곡까지 가미하니 기억이란 불확실함의 몽롱함으로 남기도 합니다. 


<시간의 언덕>은 이런 기억의 파편적이고 부정확성을 표현하려는 듯 기억을 마구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색다른 형식이 주는 몽롱함이 만들어 낸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는 힘은 좋은데 전체적으로는 이전 작품에 비해 흥미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유의 시니컬함도 많이 사라졌고요

여전히 반복과 차이는 계속 되고 있고 전작에 출연한 배우들이 까메오로 출연하는 모습은 여전한데 이전 작품에서 보이던 것들이 많이 사라진 듯 합니다. 


 전작들이 단단한 기반의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위선과 허세와 먹물들의 구토질을 봤다면  <시간의 언덕>은 이 시간이라는 무대를 부셔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게 신선하긴 한데 홍상수표 영화가 아닌 듯해서 약간은 낯선 느낌도 듭니다. 

그럼에도 주연 배우인 '카세 료'의 분위기는 꽤 정겹네요.


<시간의 언덕>은 전작인 <우리 선희>의 공간과 동일한 북촌 일대에서 촬영 했고 제가 자주 다니는 곳이기도 합니다
작년 여름에 안국동을 지나가다가 영화의 주요 배경인 카페에서 영화 촬영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그게 이 영화였네요. 

<시간의 언덕> 아마도 홍상수가 또 한 번 진화 또는 퇴보가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영화 같기도 합니다. 

40자평 : 시간의 언덕에 부는 홍상수 영화의 변화의 바람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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