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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영화 초콜렛도넛. 성소수자와 소외된 장애아가 만나 완벽한 가정을 이루다

by 썬도그 2015.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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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에 하는 '동물농장'에서는 개가 고양이 새끼를 키우거나 고양이가 강아지를 키우는 이종간의 훈훈한 미담을 가끔 담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생긴 것은 달라도 모성애라는 공통성으로 엮인 이종간의 사랑에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왜 같은 인간이 키우는 아이인데 동성애자가 키우면 더럽고 추하고 틀렸다고 할까요? 왜 그럴까요? 동성애는 다른 삶이 아닌 틀린 삶일까요? 저는 동성애자가 좋지도 싫지도 않습니다. 주변에 동성애자가 없기 때문에 그냥 낯섭니다. 분명 익숙하지 않아서 나오는 거부감은 분명 있습니다. 다만, 나에게 해가 없다면 그들이 결혼을 하건 사랑을 하건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신이 동성애를 미워하라고 지시 했을까요? 

전 그들이 믿는 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그렇게 완벽하다면서 왜! 세상에 동성애자를 만들었을까요? 그건 신의 오류 아닌가요? 전 동성애는 신의 오류도 신이 동성애를 금지시키라고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의 병든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그들을 미워하고 있고 그걸 신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있을 뿐입니다.



엄마 보다 더 엄마 같은 성소수자 루디가 보여주는 사랑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랑이야기

초콜렛도넛이라는 영화가 작년 가을 개봉했습니다. 워낙 입소문이 좋아서 보려고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상암동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무료 상영하는 초콜렛도넛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입소문은 거짓이 아님을 직접 목격했네요

영화가 시작되면 여장을 한 루디(알란 커밍 분)가 게이바에서 립싱크 노래를 합니다. 아주 예쁘장한 여자의 외모가 아닌 턱수염이 거뭇하게 있는 남자가 여장을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게이바에 한 중년 남성이 루디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루디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남자는 폴(가렛 딜라헌트 분)으로 현직 검사입니다. 이 둘은 그렇게 게이바에서 만나 사랑을 나눕니다. 

루디는 연립주택에 사는데 게이바에서 공연을 하고 근근히 먹고 삽니다. 그런데 옆집은 밤만 되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고 지냅니다. 참다 참다 한계를 넘어선 어느날 루디는 그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 턴테이블을 꺼버립니다. 그렇게 씩씩거리면서 돌아서려고 할 때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마르코(이삭 레이바 분)를 보게 됩니다.  엄마는 어떤 남자와 나가서 밤새 돌아 오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마르코를 보고 루디는 열이 받아서 검사인 폴이 일하고 있는 검찰청으로 찾아갑니다. 당황한 폴, 폴은 마르코를 아동국에 신고하라면서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집에 다시 돌아온 마르코와 루디는 아동국 직원이 마르코를 데려가 버립니다. 마르코의 엄마가 마약을 하다가 걸려서 마르코는 아동국 직원에 의해서 집단 수용 시설로 옮겨지게 됩니다. 루디는 마르코를 수용 시설에 보낼 수 없다면서 폴에게 사정을 말하고 엄마가 출소 하기 전까지만 자신이 맡아서 키울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죠. 그렇게 폴과 루디는 감옥에 있는 마르코의 엄마에게 마르코를 출소 전까지만 키우겠다고 허락을 받습니다.


그렇게 마르코와 루디의 행복한 나날이 펼쳐집니다. 초콜렛도넛을 좋아하는 마르코와 동성애자라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루디에게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행복한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법원은 루디가 마르코를 부양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 둘의 동거를 반대할 것이 뻔합니다. 



이에 폴이 자신의 경제력을 추가해서 3명의 남자는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행복한 나날들이죠. 그러나 법원은 동성애자 부부가 장애아인 마르코를 키우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성애는 다름이 아닌 틀림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코메디 소재가 아닌 현실성 높게 그린 초콜렛도넛

드라마나 영화에서 동성애자는 코메디 소재로 쓰입니다. 생각 없이 보면 그냥 웃고 말지만 동성애자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특징이 개그 소재로 활용 되는 것이 좋게 보일리가 없습니다. 이는 뚱뚱한 여자는 무식하고 못나고 멍청하다는 편견을 심는 비교 개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웃어야 그게 진짜 코메디이지 한 사람을 바보 만들어서 웃기는 코메디는 코메디가 아닌 가학증 환자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개콘을 안 보는 이유입니다.
동성애가 그렇습니다. 코메디 소재, 개그 소재로 여장을 한 남자의 변태스러움만 드러내고 활용하죠. 
이런 영화들은 퀴어 영화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이성애자들의 장난감 같은 영화들입니다. 초콜렛도넛은 다릅니다. 철저하게 동성애자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장된 모습을 보이거나 과도한 감정 이입을 끌어내지도 않습니다. 


예쁜 남자가 아닌 남자이지만 여성성을 담뿍 가진 게이의 모습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털이 복실거리고 턱수염이 잔뜩나서 누가 봐도 남자라고 바로 알 수 있는 루디가 처음으로 집이라는 행복에 겨워 울때 안자주는 모습은 엄마의 그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퀴어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퀴어 영화 중에 가장 진지하고 진중해서 마음을 움직인 영화가 초콜렛도넛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동성애자는 물론 저 같은 이성애자들이 많이 봐서 동성애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동성애자가 사회에서 어떤 편견에서 살아가는 지와 사회적 편견에 맞서서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고통도 잘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강건한 시대라서 더더욱 그 고통이 심했습니다. 



소수자라고 마음까지 소수자는 아니다

매일 같이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마약을 하면서 장애아를 방치하는 친모와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까지 바래다 주고 저녁에 잘때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동성애자 부부 중 장애아에게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후자지만 전자라고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영화를 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동성애를 절대 허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영화 초콜렛도넛을 보라고 해도 안 보시겠지만 이 영화가 마중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택하기 힘들거나 후자인 분들에게는 초콜렛도넛은 과연 아이의 행복 앞에 동성애가 무슨 큰 죄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세상은 동성애를 보고 자란 아이가 동성애를 따라 할 수 있다는 지례짐작으로 이 가족의 결합을 방해 합니다. 

하지만, 판사도 검사도 압니다. 동성애만 제거하면 루디와 폴이 마르코의 엄마 아빠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성애가 문제입니다. 동성애자가 되면 불행한가요?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가 동성애를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이런 시선은 이성애자들이 핍박을 하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는데 불행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동성애와 장애아라는 두 소수자가 만나서 완벽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은 그 어떤 가족 영화보다 따스했고 완벽한 가정이었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이 3명의 남자로 이루어진 가정이 매일 다툼하는 이성애자의 가족보다 더 따스하다는 생각을 가질수록 마음이 동요되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저들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있을까하고요. 



알란 커밍이라는 배우의 발견

알 파치노 같은 외모이고 천상 남자인데 하는 행동 하나가 여자 같습니다. 아니 여자 그 자체입니다. 
이 배우가 누구지? 영화가 끝나자 마자 주연배우 필모를 살펴 봤습니다. '알란 커밍' 이 배우는 초콜렛도넛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수많은 배우들이 게이 연기를 했지만 대부분이 어색했습니다. 어색하거나 과장된 몸짓으로 이물감이 들었는데 이 알란 커밍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냥 게이 그 자체입니다.

검색을 해보니 역시나 이 배우가 게이 연기를 잘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알란 커밍이라는 배우가 실제 게이였군요. 그래서 그런지 연기 자체가 뛰어나도 못해 혼연일체가 됩니다. 여기에 연기 노래 못하는 게 없습니다. 성우에 소설가에 다재다능함도 갖춘 배우네요. 루디 연기를 다른 배우가 했다면 이런 감동이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초콜렛도넛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화관 안이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꼰대들이 만든 세상이 얼마나 추악한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가해자에 내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같은 인간이지만 혐오스러운 인간들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동성애를 혐오한다면 전 그런 동성애를 혐오하는 인간들을 혐오합니다. 
초콜렛도넛을 좋아했던 마르코, 과연 우리는 마르코를 키울 자격이나 있는 사회인지 묻고 싶네요. 아이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우리네 아이들의 모습도 오버랩 되네요. 남자 아이가 여자 인형을 가지고 놀면 뺏어서 로봇 장난감을 챙겨주는 우리들.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아이는 손가락질 받는 세상. 그런데 그거 아세요. 1920년대에는 남자 아이들이 분홍색 옷을 입고 여자 아이들이 파란색 옷을 입고 다녔다는 것을요. 취향은 환경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남들과 다른 색을 입고 다니면 손가락질을 합니다. 

영화의 원제는 any day now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꼰대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언제든지 바뀌지는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성애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영화입니다. 알란 커밍이 3곡의 노래를 부르는데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는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네요. 

40자평 :  동성애 부부와 장애아라는 소수자가 모여서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 세상을 꾸짖는 영화
별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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