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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책서평

남한과 북한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미군폭격에 대한 이야기 '폭격'

by 썬도그 2014.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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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 김태우 교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한국전쟁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보통 이런 질문을 하면 빨갱이라는 정답(?)이 나와야 하지만 어머니의 입에서는 다른 단어가 나왔습니다.

"폭격이 가장 무서웠지"
"미군 폭격 때문에 밥을 할 수 없었어. 밥하는 집에서 나오는 굴뚝 연기를 보고 폭격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밥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

전쟁 시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습니다. 주변의 온갖 것들이 무기가 되어서 죽을 이유가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쉽게 목숨을 잃습니다. 전쟁이 무서운 것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더 싸게 취급 당합니다. 그래서 전 이 전쟁이 싫습니다. 이성은 마비되고 광끼만 돌격 앞으로 하는 전쟁. 

이 전쟁 시에 총이나 칼, 탱크 같은 지상 무기로 인한 사망이 가장 흔하지만 민간인 쪽에서는 폭격으로 인한 희생이 아주 큽니다. 그 잔혹스러운 폭격, 우리가 간과하고 잊고 있었던 폭격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 '서울사진축제'에서 들었습니다. 

<한국전쟁기 미 공군에 의한 서울폭격>라는 강의를 김태우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강사로 부터 들었는데 아주 흥미로운 내용의 강의였습니다. 참고로 이 강의는 김태우 교수가 쓴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이라는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는 강의입니다. 



2시간의 강의 시간에 많은 것을 소개할 수 없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거나 잘 몰랐던 미 공군에 의한 한반도 전체의 폭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 공군의 폭격은 북한 전역 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기만 살겠다고 군대에도 알리지 않고 한강대교를 끊고 부산까지 도망갔다가 너무 도망갔다고 판단했는지 대구까지 다시 올라와 있던 시기인 7월.  절대로 서울을 버리지 않겠다던 정부의 말을 믿고 있던 서울 시민들은 서울에 남아 있었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얼마나 황당 했을까요?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것도 국군이 미아리 쪽에서 방어하고 있는데 야반도주한 대통령. 이런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꼬라지들이 아직도 많고 새누리당은 건국의 날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박정희 보다 더 악마 같은 대통령이 이승만입니다. 

북한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에 미 공군은 폭격을 합니다. 폭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북한 공군이 괴멸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폭격을 하려면 전투기들이 호위를 해줘야 폭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 공군이 없으니 그냥 폭격기 편대가 까맣게 몰려와서 서울 일대를 폭격 했습니다. 이 폭격으로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4,280명의 서울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서울시 사망자의 24.8%로 꽤 높은 사망 원인이 됩니다.

이는 4대문 안 즉 서대문구, 중구, 용산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폭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서울은 용산과 종로, 중구 정도만 서울이었고 나머지는 다 경기도였습니다. 당시 서울 전체를 폭격한 것이죠. 



이 폭격의 역사는 2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차 대전 초기에는 군수시설이나 군대가 주둔한 주둔지 등 병참기지 등만 폭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군사 시설 폭격이 큰 효과가 없는 듯 하자 독일군은 영국 마을과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합니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 지역에 폭격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차별 폭격을 하면 전의를 상실해서 쉽게 항복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독일군과 영국군이 그런 생각으로 민간인들이 사는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했고 이에 시민들은 등화관제를 하면서 그 폭격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과 달리 민간인 지역 폭격은 전의 상실이 아닌 오히려 큰 적대감이 없던 민간인드에게까지 적개심을 키워서 오히려 항전의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또한,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폭격은 폭격 진전에는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하지만 폭격이 매일 같이 있으면 옆에 시체가 나뒹굴어도 자긴 살았다면서 약간의 쾌락까지 줍니다. 그러나 2차 대전 내내 이런 무차별 폭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인들을 쥐로 비유하면서 쥐잡이 식으로 도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목재로 만든 가옥이 대부분입니다. 지진이 많은 나라라서 콘크리트로 건물을 잘 짓지 않는다고 하네요. 이 목재 가옥이 즐비한 도쿄에 매일 같이 태펴양을 건너온 미 폭격기들이 무차별 폭격을 합니다. 특히 네이팜탄 같은 불을 내는 목적의 폭탄은 순식간에 도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무차별 폭격에 대한 논의가 2차대전 종전 후에 논의가 되었고 무차별 폭격은 무고한 희생자만 늘리지 효과도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정밀 폭격으로 다시 방향을 잡습니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 북한 공군을 싹 박멸하고 미 공군은 북한 전역을 마음대로 다니면서 폭격을 합니다. 
북한 내 공장, 도로, 철도, 항만 등등 전쟁 수행에 도움 되는 산업 시설을 철저하게 파괴를 합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7월 중순 경인가 이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을 합니다. 그 이유는 미군의 막강한 물량 공세와 화력 그리고 공군 때문입니다. 육지에서는 부산 앞까지 밀고 내려갔지만 공중에서는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해서 남한의 북한군 거주 지역은 물론 북한 전역을 폭격합니다.  북한 전역에서 들려오는 폭격 피해는 김일성에게 큰 스트레스를 줍니다. 




1950년 흥남 조선질소화약공장 폭격 사진입니다. 미 공군이 여길 정밀 폭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군이 만든 정밀 지도 때문입니다. 그 지도를 보고 이 공장을 폭격을 했는데 공장 근로자가 거주하는 기숙사르르 빼고 공장만 철저하게 파괴를 합니다. 

이게 바로 정밀 폭격입니다. 


하지만 높은 고도(대공포가 미치지 않는 고도까지 올라감)에서 폭격을 하는 B-29는 레이더 측정기로 폭격을 하지만 그게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육안으로 내려다 보고 폭격을 하는 것이 더 정밀하다고 했을 정도죠. 육안 폭격은 구름이 끼면 폭격을 할 수 없기에 레이더 측정기를 이용했는데 정확도가 아주 낮았습니다. 


정확도가 낮으니 그냥 근처에 가서 대량으로 폭탄을 떨궈서 파괴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애먼 민간인들의 희생이 아주 컸습니다.


이런 식으로 포병의 십자 포화 이상의 화력을 가진 융단 폭격이 일어났습니다. 융단 폭격을 촬영한 이 사진은 미 공군이 찍었는데 미 공군들은 자신들의 폭격 성과를 보고 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장착해서 폭격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 했습니다. 



미 공군의 제공권은 8월 초에 장악을 했습니다. 1달 사이에 북한 비행장에 있던 비행기 들을 다 파괴 했죠. 게다가 다 프로펠러기였습니다 미 공군은 세이버기 같은 제트기, 일명 쌕쌕이가 투입 되었던 시기입니다. 


위 표는 북한 공군의 공격일지입니다.  수원비행장 공격이 가장 큰 전과네요. 



미 공군은 북한 육군의 지원부대 및 병참물자와 직접적인 북한 육군을 공격 하면서 한국 및 미 육군을 지원했습니다
미 공군의 폭격은 1950년 6월 29일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서울역을 폭격한 후 일어나는 폭격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입니다.



이후 7월 서울 조차장까지 폭격을 하는데 서울 조차장은 지금의 용산역입니다. 7월 15일 맥아더는 육안으로 서울조차장 폭격을 지시합니다. 


위 사진이 바로 서울조차장, 현재의 용산역입니다. 지금은 허허벌판이 되었고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곳인데 저기에 엄청난 폭탄을 미공군이 떨굽니다. 아마 저 용산역 주변 개발 하다가 미 공군이 떨군 폭탄 많이 발견 될 것 같네요. 요즘은 뉴스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8,90년대만 해도 아파트 공사나 건물 올린다고 지하 깊히 파다가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이 떨군 폭탄을 발견하면 한국 공군의 폭발물 처리반이 출동해서 처리하곤 했었습니다



이 7월 16일 서울조차장 폭격을 본 분이 그 용산 폭격을 묘사한 글입니다. 


서울 폭격은 이후 잠잠해 지다가 1.4 후퇴 때 다시 폭격이 이루어집니다. 이 1.4후퇴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서 연합군이 한강을 넘어 대전 인근까지 밀렸습니다. 이 1.4후퇴 때는 서울 시민들이 대부분 피난의 짐을 싸고 서울을 떠나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인구 13만의 텅빈 도시가 됩니다. 

이곳에 미공군은 다시 폭격을 합니다. 


서울은 한 마디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특히 학교들이 많이 파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북한군이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고 눈에 확 들어오는 건물이기에 많은 학교가 파괴 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북한의 사진입니다.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해서 북한 주민들은 지하에서 먹고 자고 배우곤 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보다 미국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는 이 폭격 때문이라고 하죠. 밤새도록 폭격을 하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하며 심지어 민간인인 줄 알면서도 기총사격이나 폭격을 했습니다

물론, 미 정부는 이런 사실을 인정 안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밀문서들이 최근에 비밀 유지 기한이 풀리면서 당시 폭격기나 전투기 조종사가 쓴 비행 일지에는 미군 조종사들의 죄책감을 담은 일지들이 발견됩니다.  

이런 잔혹한 미군의 모습에 치를 떨고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미군을 엄청나게 싫어합니다. 


한국 전쟁 후기에는 미 공군은 다시 무차별 폭격 전술로 바꿉니다. 초기에는 정밀 폭격을 고수했지만 나중에는 B-29로 융단폭격을 하거나 닥치는 대로 폭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전역이 요새화가 되었나 봅니다. 미국의 무서운 공중 폭격에 대한 대비 태세라고 할 수 있죠.

폭격은 피아 식별을 할 수 없는 공격 방법입니다. 그 지역에 아군이나 민간인이 있는 것을 알지만 조준 사격할 수 없기에 무고한 희생을 야기합니다. 포격도 비슷하긴 합니다만 포격은 어느 정도 피아 식별을 하면서 쏠 수 있는데 폭격은 그게 힘들죠. 특히나 고고도에서 움직이는 B-29는 폭격 정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이 보다 더 자세한 내용과 폭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책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책 시간 날 때 꼼꼼하게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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