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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 대한 쓴소리

한국의 암기 위주 교육이 질문과 실패를 두려워하는 세상으로 만들다

by 썬도그 201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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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영상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 영상은 2012년 G20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G20 개최국인 한국에 대한 배려로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었지만 한국 기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단 한 명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치고 나온 기자는 중국 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재차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 우선권을 주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한국 기자들은 묵묵무답이었습니다 


결국 질문권은 중국 기자에게 넘어가고 중국 기자는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에게 송곳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된 이유는 EBS의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질문을 하지 못할까?


고백하자면 저는 극도로 질문을 하지 않은 학생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초,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질문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저만 그럴까요?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질문도 하지 않고 학창 시절을 마쳤을 것입니다. 이는 대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질문을 하는 학생은 정해져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학생만 질문을 했던 것 같네요. 
왜 우리는 질문을 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수업 시간을 넘어서 여러 자리나 장소에서 질문을 하지 못할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질문하는 자체를 상당히 불경스러워 합니다. 
질문 한다는 자체가 내가 모른다는 것을 남 앞에서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궁금하지만 자신의 무식을 드러내기 싫어서 우리는 그냥 모른채 넘어갑니다. 이런 두려움 뒤에는 쟤는 저것도 몰라서 질문을 하냐?라는  우리들의 속마음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모르면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는 것을 상당히 죄스러워 합니다. 

또한, 남들 앞에서 나서서 말하는 것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다 보니 다른 사람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질문을 하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합니다. 선생님과 1대 1로 질문을 하면 잘 하다 가도 많은 사람이 있는 교실이나 회의실 또는 강의실에서는 질문을 잘 하지 못합니다. 



나와서 발표하는 show and tell 문화가 없는 한국


미국에는 쇼 앤 텔(show and tell) 교육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 때 아이들의 퍼블릭 스피킹 능력을 가르치는 과목이 따로 있습니다. 형식은 간단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들고 나와서 난 이게 왜 좋고 블라 블라 떠들면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앞에 나온 아이는 대답을 합니다. 

서양 아이들이나 한국 아이들이나 앞에 나서는 것은 편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쇼 앤 텔 시간을 넣어서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방법,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습득하게 합니다. 쇼 앤 텔의 장점은 읽고 쓰기를 넘어서 말하는 방법을 키워줄 수 있습니다. 또한 질문과 대답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을 배웁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 청년들을 모아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 속에서 질문을 하고 답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즉 비판적 추론력을 키웁니다. 

또한, 이야기를 하는 방법과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법도 배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표현력과 자신감을 심어주죠. 
이렇게 어려서부터 질문을 하는 방법, 남들 앞에서 말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이런 쇼 앤 텔 문화가 조금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런 대중 앞에서 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학교를 졸업합니다. 이러니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남들 앞에서 말하고 질문하는 것을 거북스러워하죠. 

질문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화가 없다 보니 질문도 부끄러워서 못하고 무지도 부끄러워합니다. 서양인들이 질문을 잘하고 말을 조리있게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다 어려서 부터 이런 교육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암기 위주의 교육을 하는 한,중,일

중국에서는 관리를 뽑기 위해서 과거 시험을 봅니다. 전국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서 몰려드는데 이 과거 시험이 바로 암기 위주 공부입니다. 중국의 한자는 표음문자가 아닌 표의 문자이기에 언어 배우는 과정 자체가 암기입니다. 한자를 외워야 하니까요.  그러나 서양의 알파벳은 표음 문자라서 문자 자체를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암기 위주의 교육이 발달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이상하게도 한,중,일 이 한자권 문화의 나라는 예전부터 교육이 암기 위주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도 책을 달달 외워서 글을 쓰는  것이고 현재의 수능, 심지어 대학생들이 필수적으로 테스트하는 토플과 토익도 암기입니다.  영어, 수학은 암기 과목이 아니라고 하지만 크게 보면 국영수도 모두 암기 위주 교육입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누가 누가 더 많이 암기해서 수능에서 쏟아내나! 하는 경연대회 아닌가요? 수능이 창의성을 테스트하는 시험제도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10년 넘게 암기를 해서 수능 당일에 쏟아내는 것이죠. 그래서 모르면 그냥 외우라는 말이 농담이 아닌 것입니다. 

반면, 서양은 어떤 사물이 이치와 원리를 깨닫는데 중점을 둡니다. 원리를 깨달으면 따로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교육의 차이는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서양 방식이 옳고 우리의 암기 위주 공부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교육법은 일장일단이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 복잡다단한 세상 특히 더 이상 암기력이 능력이라고 하기 힘들어진 현재에도 암기식 공부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뭐하러 외웁니까? 스마트폰에 저장해서 그때 그때 꺼내보면 되죠. 인터넷 검색만 해도 지식과 정보는 다 있습니다. 문제는 그걸 융합하고 섞을 줄 모릅니다. 개념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만 가르치고 지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외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암기 위주의 교육은 예전엔 좋은 점도 있었지만 점점 창의력을 요구하는 현 시대, 즉 여러가지 개념들이 섞이는 융합의 시대에는 크게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가지 개념만 딱 잡고 있고 그 개념들을 섞고 그 섞은 개념에서 새로운 개념을 추출해내는 창의력을 요구하는 시대에는 암기 교육은 크게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부에서는 창의력 교육 한다 어쩐다 하지만 큰 얼개는 여전히 암기 위주 교육입니다. 이 암기 위주 교육은 기존의 것을 좀 더 빨리 처리하고 좀 더 작고 정밀하게 만드는 것은 잘 해도 새로운 카테고리를 생성하지는 못합니다. 한국의 잘나가는 제품들 중에서 한국에서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 몇 개나 있습니까?  거의 다가 외국에서 먼저 선보인 제품과 서비스를 좀 더 다듬어서 더 좋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죠. 

90년대 말 2천년 대 초 한국은 대단한 창의력을 가진 인터넷 서비스들이 많았습니다. 이때는 인터넷에 대한 규제도 없고 수 많은 생각들이 지위고하와 남녀노소와 서열을 무시하고 섞이면서 세계 최초의 인터넷 서비스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세요.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여러 해외 서비스가 국내 런칭을 하지 국내 인터넷 서비스가 해외에 소개 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인터넷이 생각의 해방구가 되었다가 지금은 오프라인과 동기화 되면서 경직된 한국 사회의 판박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저는 이 암기 위주의 교육이 질문 안하는 문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암기하는데 무슨 질문이 필요합니까? 그냥 몽땅 때려 넣고 외우면 되죠. 영어를 왜 배우는지 누구 하나 질문을 합니까? 그냥 그 질문 시간에 영어 숙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낫다고 하죠. 수업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라는 억압적인 분위기도 아직도 많고 질문하면 수업 진도 나가기 힘들다며 형식적으로 질문있나?라고 하죠. 

차라리 1달에 1번 정도는 수업 진도 나가지 말고 이달에 배운 것에 대한 것중에 궁금한 것을 질문하게 해보세요. 못하겠죠. 처음에는 못할 것입니다. 어려서 부터 질문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강제로 할당해서 시켜보세요. 그리고 어떠한 질문도 핀잔을 주지 말아보세요. 나중에는 서로 질문하려고 할걸요. 



한번 실패하면 그걸로 끝인 한국과 실패의 경험을 우대하는 실리콘 밸리

이런 질문을 못하는 분위기는 사회 생활로 까지 이어집니다. 좋은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쓰잘덱 없는 질문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 자체는 나쁜 질문은 없습니다. 나에게 유용한 질문을 질문자가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중에 그런 질문과 의문이 새로운 창의력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하지 않는 문화는 삶의 태도를 수동적으로 바꿉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암기 위주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외울 것이 사라지면 뭘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하는 질문도 없지만 자신에게 하는 질문도 암기 교육에 깔려서 하지 않고 살다 보니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도 잘 모르고 졸업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렇게 수동적인 삶의 상태에서 무슨 벤처 기업을 창업을 하겠습니까?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속에서도 창업을 잘 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젊은 나이에 창업을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창업했다가 망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한번 망하면 그것으로 기회는 사라집니다. 
창업했다가 망해서 기업에 취직하려고 하면 창업 실패의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닙니다. 왜 망했어요?라며 면접관이 핀잔어린 시선을 줍니다. 이래서  일이 없거나 쉬고 싶어서 쉴 때도 취직을 하려면 뭔가를 했다고 거짓이라도 둘러 되어야 합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삶을 기업들은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는 다릅니다. 
실리콘 밸리는 사업 실패를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면서 우대해줍니다. 한번 부러졌던 뼈는 다른 곳이 부러질지언정 같은 곳은 다시 부러지지 않습니다. 한 번 실패를 해보면 성공했을 때 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똑같은 실패를 다시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실패에 손가락질을 합니다. 

이는 질문을 못하는 이유와도 연결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내 질문에 사람들이 웃으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은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옵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질문도 가로막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질문을 잘 하는 이유가 질문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거 질문 해도 되나?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업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실패하면 낙오자 취급 받을텐데라는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암기 위주의 교육 때문에 창의적인 생각도 잘 나오지 않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쉽게 사업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한국의 교육은 암기 위주 교육도 문제지만 낙오자를 보듬어주는 문화도 없습니다. 학교에서 이탈한 학생들을 정부가 보듬어줄까요? 아닙니다. 그냥 버러버립니다. 마치 고장난 부품 마냥 버려버리죠. 이런 문화는 사회로 까지 이어집니다.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버려버립니다. 이런 시스템에서 무슨 창의성이 나오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겠습니까? 

실패에서 얻는 경험이 더 많은 것을 인정 못하는 사회에서 무슨 융합이 나오고 창조경제가 나오겠습니까?
오늘도 왜 외우는지도 모르고 달달 외우고 있는 한국 교육은 아는 길을 빠르게 갈 수는 있어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천상 2차 산업이나 잘 하는 국가로만 머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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