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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장맛비 같은 사랑을 담은 '언어의 정원' 촉촉한 빗물 같은 영화(스포 있음)

by 썬도그 201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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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의 리뷰를 2개를 쓴 적은 있어도 그건 몇 년이 지난 후 쓴 리뷰였습니다. 같은 소설이나 영화도 20대 때 보는 것과 30대 때 보는 것과 40대 때 보는 것이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대사나 영상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 경험이 쌓이고 생각과 시선이 달라졌기에 같은 영화라도 보는 시선도 안 보이던 부분도 세세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영화를 하루에 2개의 리뷰를 쓰는 것은 처음이네요. 아! 이 블로거 이 영화에 푹 빠졌구나 핀잔을 줘도 좋습니다. 왜냐한면 이 영화를 1편의 짧은 리뷰(짧지도 않았지만)로는 끝낼 수 없습니다. 

2013/08/16 - [세상 모든 리뷰/영화창고] - 영상의 혁명을 보는 듯한 '언어의 정원' 감수성 폭발 애니

라는 글을 오후에 썼는데 이 리뷰는 주로 기술적인 즉 영상 미학에 너무 많이 할애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너무 스치듯 다룬 듯 합니다. 또한, 스포를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내용을 다 말하지 못했고요

그러나 이 리뷰는 스포를 다 밝히고 내용을 세세히 적으면서 제 감상을 다 적어볼까 합니다. 영화 개봉 후 한 참이 지난 후에 적어도 되지만 그때는 또 이런 글을 쓰지 않는 것을 알기에 지금 다 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적습니다. 또한, 이 리뷰는 '언어의 정원'을 본 사람들과의 느낌 공유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영화를 안 봤거나 보실 분은 살며시 뒤로 버튼으로 물러나 주셨으면 합니다.

영화 속에서 유키노가 맥주와 초콜렛을 안주로 삼아서 먹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저도 지금 맥주와 초콜렛을 안주 삼아 먹고 있습니다. 이거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맛입니다. 맥주의 쓴맛이 초콜렛의 단맛에 가려져서 술이 달게 느껴집니다. 소주와도 궁합이 맞을 것 같기도 하고요. 


사랑, 그 이전의 사랑 이야기

영화 내용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48분 짜리 단편 영화 수준의 길이지만 또 풀어보면 이게 참 긴 여운을 그리고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영화가 바로 '언어의 정원'입니다. 

영화의 카피 문구에도 나오지만 '사랑 그 이전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언어의 정원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고등학생 1학년인 다카오와 27살의 유키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주인공인 다카오입니다. 다카오에게 있어서 유키노는 사랑, 이전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첫사랑을 이야기 할 때 보통 짝사랑을 첫사랑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을 첫사랑에 포함하지만 짝사랑은 풋사랑이라고 치부하죠. 하지만 가장 강렬한 감정은 어쩌면 짝사랑부터 시작하지 않나요? 그것도 또래 보다는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고 저 또한 그런 짝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게 단지 완전체로 보이는 사람에게 향하는데 그게 대부분 선생님입니다. 특히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보다 더 심합니다. 돌이켜보면 그 짝사랑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었나? 돌이켜보게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겠네요. 그러나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모르던 시절에도 여 선생님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아 그 이상의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카오의 사랑은 좀 다르긴 합니다. 이제 말해야겠네요. 유키노라는 27살의 여주인공은 다카오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여기서 흔한 불륜 소재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둘의 사랑은 불륜이나 연상 연하 커플의 흔한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기 보다는 사랑 앞에 주저하고  좀 더 다가가는 그리고 하나의 지팡이 또는 친구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지니까요. 긴 장마 기간에 만나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던 그 찰나의 순간에 둘은 깨닫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어른이었던 다카오


다카오는 어린 나이에 철없는 엄마 때문에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혼자 밥도 하고 반찬도 만들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너무 일찍 찾아서 학교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구두 디자이너가 되겠다면서 전문학교에 갈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알바를 뛰죠. 

이런 다카오는 아침에 비가 오면 신주쿠의 한 공원으로 향합니다. 한 정자에서 구두 디자이너의 꿈을 위해 수 없는 스케치 작업을 합니다. 다카오가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등교 길에서 맡는 낯선 사람 옷에서 나는 나프탈렌 냄새 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늘 냄새 머금은 비를 좋아합니다. 

이런 다카오에게 있어 학교는 그냥 시간을 때우는 곳입니다. 연하의 새 남자 친구를 사귀는 엄마, 여자 친구와 동거를 하겠다는 형, 주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어른 답지 못합니다. 반면 다카오는  유키노 선생님이 보고 싶어도 자신의 꿈을 위해 절제를 할 줄도 압니다. 나이 40이 넘어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데 이 고등학교 1학년인 다카오는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른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유키노


다카오가 찾아간 정자에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맥주와 안주로 초콜렛을 먹는 20대의 여자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비만 오면 이 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 스스럼 없는 사이게 됩니다. 둘 만의 아지트가 된 것이죠. 다카오는 자신의 꿈을 보여주고 이러저런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이상하게 유키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처음 만남에서 유키노는 만엽집의 단가를 읇조립니다. 
그 단가는 다카오가 "우리 전에 본 적 있지 않나요?"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텐데"


이 단가는 유키노가 정체성인 학교 선생님에 대한 힌트였지만 다카오는 학교 생활에도 선생님에게도 관심이 없어서 유키노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유키노는 어린 아이 같은 27살의 여자입니다. 16살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나이만 먹은 27살 여자. 

그래서 스스로 자긴 스스로 걷지 못한다면서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키노는 학교에서 안 좋은 소문에 쌓게 되어서 타의에 의해서 학교를 그만 두게 됩니다. 진실은 그게 아닌데 소문에 쉽게 무너진 유키노, 그런 그를 잡아줄 애인도 떠난 상태입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유키노. 나이만 27살이지 문제 해결 능력은 젬병이고 자꾸 자기 안으론만 파고 듭니다.  이런 어린 유키노에게 어른 그러나 제자인 다카오가 다가 옵니다.

유키노는 다카오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자기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교복을 보고 압니다. 그러나 모른척 합니다. 
반면 다카오는 유키노가 누군지 모르죠. 그렇게 둘은 장마가 차려놓은 정원에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와 둘 만의 시간을 공유합니다. 그렇게 시나브로 서로에게 물들게 되죠. 

이 어린아이 같은 유키노를 학교에서 만난 후에 다카오는 폭발하게 됩니다.



유키노가 걸을 수 있게 구두를 만들어주는 다카오


유리 같은 유키노에게 다카오는 자신을 조롱 했다면서 선생님도 내가 구두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유치한 아이의 장난질이라고 해도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면서 따집니다. 그러는 분이 왜 아이같이 사냐고 윽박을 지르죠.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치유된다고 하죠. 유키노는 빗물과 함께 큰 눈물을 흘리며 다카오에게 기댑니다. 

자신의 유아적인 행동, 항상 힘들어하고 기대려고 하고 빗속에 숨으려고 하고 맑은 햇살을 피해 비구름 아래서 맥주나 홀짝이는 자폐적인 모습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카오에게 있어 비는 새로운 세상을 나가기 전의 하나의 쉼터였다면 유키노에게 있어서 비는 쉼터가 아닌 은신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찾지 못하는 동굴 같은 곳. 같은 공간이지만 다카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쉼터, 유키노에게 있어서는 쉘터였습니다. 

단지, 공간만 공유할 뿐 둘에게 있어서 의미는 다릅니다.
그러다  유키노에게 물리적 비가 아닌 마음의 비가 크게 내린 후 학교를 떠난 후 자신의 은신처에 도착합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카오도 유키노를 만났던  정자로 향하게 됩니다. 맑은 날 만난 두 사람. 

어색할 수 있지만 그 어색함을 치유라도 하듯 큰 먹장 구름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강풍과 큰 비가 둘을 젖십니다. 
시간을 공유함을 넘어서 이제는 비를 공유합니다. 

이 '언어의 정원'에서 비는 상황에 따라서 다른 비로 느껴지게 됩니다. 뛰어난 비 표현력이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주인공의 상황에 따라서 비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카오는 여자 구두를 만드는데 모델이 되어 줄 수 없냐면서 유키노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보여주지 않던 유키노도 이 어린 학생에게 마음을 엽니다. 보통 결말은 유리 구두를 신겨 주듯 다카오가 유키노의 발에 유리 구두라도 신겨줘야 하지만 그런 결말은 없습니다. 그냥 한 여름 장마 같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헤어지죠. 그리나 서로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2014년 2월 다카오는 비밀의 정원에서 자신이 처음 만든 구두를 내려 놓습니다. 유키노가 신을까요?
유키노가 다른 학교에서 눈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는 모습은 참 인상 깊었습니다.  다카오를 생각하고 동시에 혼자 걷는 모습을 담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다카오의 답가가 유키노의 지팡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에 머무를 겁니다
당신이 있어달라 말해 준다면"


그리고 언어의 정원 주제가인 Rain이 흐릅니다. 



다카오가 어른 같아진 이유는 엄마 때문입니다. 아빠와 이혼하고도 연하의 남자 친구와 연애를 합니다. 그게 큰 상처는 아닙니다. 일본은 한국 보다 이런 관계망이 자유로우니까요.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어린 다카오가 엄마의 선물인 구두에 꽂힌 것도 자신의 피난처를 찾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구두에 미쳐 있어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인 유키노도 알아보지 못했죠. 

어른인척만 했지 실제로 어른은 아니였습니다. 어른의 가면이 빗물에 벗겨진 다카오, 그런 다카오의 모습에서 치유를 받은 유키노, 그런 유키노를 통해서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다카오. 어떻게 보면 성장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비를 매개체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이야기의 깊이는 없지만 그 짧은 시간에서도 깊은 묘사력과 세세함이 빛을 발합니다. 2시간 짜리 영화에서 받은 감동과 사진 1장에서 받은 감동이 비슷하거나 찰나의 예술인 사진이 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 듯 이 '언어의 정원'은 러닝타임 48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는 사진과 같은 영화고 실제로 많은 이야기 부분을 스틸 사진처럼 편린화 시켜서 넘겨 버립니다. 충분히 길게 끌 수 있었지만 군더더기 없게 다 사진처럼 압축 시켰습니다. 

장마철에 봤으면 더 좋았을 '언어의 정원' 정말 기대 했던 이상의 영화였습니다.  DVD로 나오면 바로 소장해야겠습니다. 
비에 대한 사랑의 추억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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