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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서울여행

인사동 입구에 있는 3.1운동 발원지 승동교회

by 썬도그 201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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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을 수시로 들락거리지만 매번 갔던 곳만 가게 됩니다. 익숙한 곳을 자연스럽게 찾는 것도 있지만 더 이상 캐낼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나 이건 제 게으름 때문이 가장 큽니다. 

우연히 관광어플로 인사동 입구에서 스캔을 해보니 제가 서 있는 바로 앞에 역사적인 건물이 하나 있더군요. 
승동교회?? 옆에는 3.1운동 거사를 모의했던 곳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네요.


인사동 입구에서 두리번 거렸습니다. 두리번 하자마자 바로 보이는 곳이 승동교회네요. 평소에는 그냥 길이나 혹은 어떤 회사의 건물인 줄 알고 들어가보지 않았습니다. 성당이나 사찰이나 교회는 대부분 개방적인 공간이기에 쑥 들어가 봤습니다. 




승동교회는 역사가 120년이나 되었네요 19세기 말인 1893년에 설립이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에 세워졌네요
이 승동교회는 설립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조선시대 말인 19세기 말에는 백정은 상투를 틀지 못했습니다. 상투를 틀 수 있다는 것은 어른됨의 증거이지만 백정은 하는 일이 천해서 어른이 되어도 상투를 틀 수 없었습니다. 조선 봉건주의 계급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죠. 

박성춘은 백정이었습니다. 백정으로 태어나서 백정마을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딸과 아들을 백정으로 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천주교 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곤당골 예수교학당으로 보냅니다. 동학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은 시체들이 넘치다 보니 콜레라가 창궐합니다. 이 콜레라에 박성춘도 쓰러집니다. 그러나 이 백정 박성춘을 미국의 목사인 '사무엘 무어'가 극진하게 치료를 해줍니다. 이 치료에는 고종이 주치의도 있었는데 이에 많은 사람이 놀랍니다.

고종을 치료하는 손으로 백정으로 치료했다 이거죠. 

하지만 사무엘 무어는 백정도 사람이고 하나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면서 말했지만 당시 조선 양반들은 노발대발합니다. 박성춘은 사무엘 무어 목사가 운영하는 곤당골교회에 다니게 되었지만 당시 양반들은 또 천한 것과 함께 교회를 다닐 수 없다면서 모두 나가버립니다. 그러고보면 조선시대는 여러모로 꼰대사회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나갔던 양반들이 다니던 교회와 곤당골 교회가 합쳐져서 승동교회가 됩니다.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조선 최초 양의사가 되었고 3.1 운동 당시 만주 독립군 단체인 대한국민회를 크게 지원합니다.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독립 운동도 활발하게 지웠했던 교회가 승동교회입니다.



저 멀리 종로의 랜드마크인 '탑 클라우드'가 보입니다. 

교회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으리으리하지도 않습니다. 대형 교회와 다르게 소박합니다. 
언젠가부터 교회들이 금빛을 두르고 있던데 그런 외형적인 성장을 보면서 안쓰럽다는 생각이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번쩍 거리게 지으라고 지시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화려하게 짓는지요. 

예수님 때문이겠습니까? 목사들 자기들 때문이죠. 또한 세습을 하기 위해서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그렇게 크게 짓는 것 아닐까 합니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전 허름하고 소박한 이런 교회가 더 정이갑니다. 더 종교시설 같고요. 


승봉교외 바깥에는 많은 테이블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테이블이 눈에 쏙 들어오네요. 


저 멀리 인사동 건물들이 보입니다. 이런 곳이 인사동에 있었다니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했습니다.


예배당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들어갈 것 같네요.  주일에나 교인들을 위한 공간이기에 근처만 들러 봤습니다.


승동교회는 3.1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삼쩜일로 읽는다는 3.1절 
3.1절은 한국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라는 시스템에 복종하는 대부분의 조선인들 중에서도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9년 2월 20일 연희전문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3.1운동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3.1 독립 선언서를 배포합니다.  


이런 저항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앞장섰습니다. 학생들이 젋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없기 때문에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학생들은 식자층이자 진정한 엘리트들이기도 했습니다.

뭐 지금은 대학생이 엘리트라고 할 수도 없고 저항의식도 많지 않은데 그럼에도 학생들이 앞장 설때가 많습니다. 이번 국정원 댓글사건과 선거개입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잖아요. 물론 일부지만요.

이렇게 성냥불을 당긴 3.1운동은 일부를 넘어 범 국민적인 저항 운동이 됩니다
총 7,509명이 죽고 부상자 1만 5961명 체포된 사람만 4만 6948명이었습니다. 엄청난 생명이 사라졌고 무저항운동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가 알아줬으면 했지만 당시 미국이나 러시아나 프랑스나 다 제국주의자들이라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눈감아 줬을 것입니다. 뭐 자기들도 하는데 일본 너도 그럴수 있다~~ 라고 했겠죠


승동 교회에는 오래 되어 보이는 종 탑이 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보던 그런 종이네요





교회는 아주 작습니다. 작아서 5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긴 여운이 남는 교회입니다. 
역사적인 공간이지만 저도 몰랐 듯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우리는 찾아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있네요.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불운한 역사를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일본이 그 본보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항도 역사의식도 없는 일본 민족, 지금 그 일본에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나오지만 누구 하나 그 모습에 저항하지 않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는 일본을 보고 있노라면 저 민족은 매너가 좋은 것이 아니라 비판의식도 문제의식도 없는 민족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또한, 역사의식도 없습니다. 아무리 매너 좋은 사람이라도 저항 의식이나 문제 의식이 없으면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느껴서 전 싫던데요. 그래서 좋은 것이 좋은 거다 식으로 넘어가는 물렁이들이 싫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왜 좋은 것인지 부터 따져보고 좋은 이유를 알고 좋아해야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네요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치니 아이들이 3.1절도 모르죠. 누구 때문이겠어요. 다 그 학생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인 지금의 30,40,50대들이 저질러놓은 현상인데요. 다 우리들 탓입니다. 부디 일본처럼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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