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주병진쇼는 갈팡질팡 그 자체였습니다. 20세기 스타가 21세기에도 먹힐 줄 알았던 MBC는 극진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며 코미디의 제왕 주병진을 모셨지만 구태스럽고 느려터진 진행과 구시대적인 썩은 개그에 우왕좌왕하다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그 이상한 행동이란 거대한 붉은 소파를 거리나 해변가 등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과 마구잡이로 인터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멧이 너무 거북스러웠습니다. 한 번은 남산 도서관 인도에 붉은 소파를 놓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잡아서는 억지로 인터뷰를 하는데 인터뷰 내용도 재미없고 억지 인터뷰 하는 느낌이 들어서 짜증만 났습니다 솔직히 주병진이 불쌍했습니다. 저렇게 까지 망가져야 하나? 결국 주병진은 옛 개그맨 동료를 불러서 M.T를 가는 등 나름 심폐소생술을 하지만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주병진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다 무너지고 앞으로 TV에서 볼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시류에 휩쓸리는 것도 너무 문제지만 시류를 무시하고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는 연예인도 참 문제입니다.
주병진쇼가 남긴 것은 불근 소파 밖에 없었습니다. 주병진이 붉은 소파를 들고 나오면서 사진작가 XXX는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어떤 작가일까 궁금 했습니다. 붉은 소파를 놓고 인터뷰를 한다는 내용은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이런 창의력 있는 작가가 누굴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에 갔다가 이 붉은 소파라는 책을 발견 했습니다.
이 붉은 소파는 독일의 사진작가이자 비디오 예술가인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의 사진 & 인터뷰집 입니다.
1979년 뉴욕의 소호거리의 한 조각가 작업실에 있던 낡은 붉은 소파를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그 소파를 백화점 앞으로 옮기고 지나가던 사람들을 앉히고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붉은 소파는 긴 여행을 하게 됩니다.
이 붉은 소파라는 사진집 왼쪽에는 인터뷰이의 나이와 출신지와 간단한 이력들과 호르스트 바커바르트가 질문한 내용과 그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오른쪽은 붉은 소파에 앉아 있는 인터뷰이들의 사진들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진들은 아주 개성이 가득하고 창의적이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사진만 보면 대충 느낌이 올 정도로 잘 연출된 사진입니다. 공통점인 붉은 소파를 놓고 다양하게 표현을 하는데요.
외인부대 군인 같은 경우는 위장막을 소파위에 씌우고 예술가는 소파를 세로로 세워서 앉기도 하고 공중에 띄우고도 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붉은 소파는 무덤 위의 붉은 소파입니다. 또한 협곡사이에 끼어 놓기도 하고요. 사진 한 장이 단순하게 붉은 소파에 인터뷰이를 앉히고 촬영한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나게 아주 잘 연출된 사진들입니다. 때문에 사진만 봐도 대충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이 붉은 소파에 유명인만 앉힌 것도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들만 앉힌 것도 아닙니다. 무작위로 정말 아무나 카메라 앞에 붉은 소파에 앉힌 후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인터뷰 질문 내용은 10개 정도의 질문입니다.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불행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 중 최악이었던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사후세계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가장 큰 바람은 무엇인가?
당신이 범한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인가?
당신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
당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당신에게 동물과 식물은 어떤 의미인가?
당신은 누가 혹은 무엇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이 질문에 인터뷰이들은 각자의 다양한 삶 만큼 다양한 대답을 합니다.
질문은 간단하지만 삶을 관통하는 통찰력 있는 질문들입니다. 인터뷰이들은 정말로 다양합니다. 세계적인 정치인인 고르바초프와 사진집의 표지인 고릴라 박사 제인 구달, 거지, 부랑아, 식료품점 접원, 환경 미화원 등 실로 각양
각층의 사람들을 붉은 소파라는 평등함 위에 앉히고 평등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이 직업과 나이와 성별과 인종과 상관없이 하나하나 감동을 줍니다.
이건 마치 2차대전이 끝난 후 사진으로 세상을 담은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인간가족 전을 보는 느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수록 신을 강하게 믿는 다는 것입니다. 식자들은 신을 믿기도 안 믿기도 하고요.
이 질문을 저에게도 순간 해 봤습니다.당혹스럽게도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아마도 다른 삶이나 사회에 대한 질문이었다며 30분 정도 떠들 수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은 거의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행복이란? 불행이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 큰 바람? 사후세계?
인상 깊었던 것은 15살의 루마니아 부랑아와의 인터뷰였습니다.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일은 곧 구걸이예요"
사후세계에 대한 당신의 기대는 무엇인가?
"지옥에나 떨어지겠죠"
15살 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이런 절망을 가득 가지고 살아가는 자체가 절망스럽습니다
환경이 중요합니다. 아이는 모두 저 붉은 소파처럼 평등하게 자랄 권리가 있고 그래야만 그 사회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부모 팔자 반 팔자라고 하지만 출발할 때의 조건은 달라도 레이스를 할 때는 공평한 조건으로 뛰게 해야 하지만 우리네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한국은 불평등을 공평하다고 착각하는 어른들이 대다수입니다.
평등의 가치를 너무 몰라요.
저는 저 붉디붉은 소파에 서서 평등을 느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앉던 스티브 잡스가 앉던 부랑아나 거지가 앉던 시인이 앉던 영화감독이 앉던 크기는 똑같으며 똑같은 카메라로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렇게 붉은 소파라는 규격으로 세상의 삶을 담는 모습은 비록 생김새와 인종과 지위와 명성과 성별과 나이는 다 다르지만 인간은 모두 같다는 생각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인터뷰 내용과 사진을 보다 보면 한 장 한 장에 그 사람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넘겨 보기 힘들 정도로 진득하게 일게 됩니다. 한 장 넘길 때마다 붉은 소파는 여러 모습으로 그 기대감이 이 사진집을 넘기는 재미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을 때 힘들어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지낸 그 시간을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남들과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집 붉은 소파는 주로 유럽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했고 90년대부터 2천 년 대까지의 사진들입니다. 하나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한 장 한 장 여운이 많이 남네요.
사람이 한 권의 책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가서 그렇지 말을 붙여보고 시간을 내서 들여다보면 사람은 한 권의 책입니다. 따라서 이 붉은 소파는 인명사전을 넘어서 삶의 백과사전 같은 느낌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사진집이자 인터뷰 책을 만나게 되었네요
도서관에서 빌려서 봤는데 중고책이라도 구매를 해야겠습니다.
"당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저는 호르스트 같은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요. 난해하고 자폐증 같은 찡얼거리는 사진보다는 명징하고 직설적인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사진에 담을 수 없으면 글로 담으면 됩니다. 그게 더 확고한 메시지 전달입니다. 다큐 사진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한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