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한국여행

월성과 안압지(동궁과 월지)에서 옛 추억에 젖다

by 썬도그 2013. 5. 10.
반응형

경주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입니다. 도시 자체는 그냥 평범한 지방 도시의 풍경을 다 갖고 있지만 다른 도시에 많지 않은 문화 유물이 노천에 가득하게 깔려 있습니다. 노천 박물관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이 경주 여행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경주 향교와 교촌 치킨과 큰 관계가 업는 교촌 마을을 나와 월성을 찾아 갔습니다. 사진 오른쪽 언덕 같은 곳이 월성입니다. 
이 월성은 신라의 궁궐이었습니다. 좀 초라한 궁궐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흔적이 전혀 없고 그냥 터만 남아 있습니다. 월성이라고 지어진 이유는 반달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반달 모양은 남천과 해자를 만들어서 적군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궁궐의 크기는 첨성대까지 주출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저 언덕 을 넘어서 까지 이어졌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월성 안으로 들어간듯 합니다. 그런데 성이 돌로 안 지어졌는데 돌무대기도 없네요. 오로지 해자로만 방어했나 봅니다. 




월성에 올라가 봤습니다. 
경주는 이 소나무가 참 유명해요. 사진작가 배병우 때문에 더 유명해졌죠. 저런 거북 등껍질 같은 굵은 무늬가 참으로 인상깊네요. 이 월성은 원래 호공이 살던 곳인데 신라 4대왕 석탈해 왕이 이 호공을 속여서 이 터를 차지한 후에 파사왕때 이 곳에 궁궐을 지으면서 궁궐이 지어지게 됩니다.


월성에는 서빙고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얼음 창고입니다. 겨울에 언 얼음을 잘라서 여기에 얼음을 보관하고 여름에 꺼내 먹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대형 냉장고입니다. 

석빙고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외부의 더운 공기를 차단하고 환기구를 만들어서 더운공기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석빙고는 권력자용이었기 때문에 왕이나 귀족들이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월성 전경입니다. 반달 모양이라기 보다는 초승달 모양이네요. 석탈해는 일본 동북쪽에 있는 용성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용성국 사람이 신라의 왕이 됩니다. 여왕도 그렇고 이런 외지인 아니 외부인이 왕까지 했던 신라를 보면 신라라는 왕국은 대단히 진보적인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수주의자가 많은 곳이 되었네요. 

 


성이라고 하지만 그냥 작은 구릉 같고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뭘 느끼기에는 부족합니다. 




날씨가 조금만 좋았다면 참 좋았으려만.. 그래도 가끔 빛줄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방에 가면 사극 촬영지가 참 많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뛰어난 세트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국에 엄청난 세트장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드라마나 사극을 세트장에서만 찍는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 '대장금'은 창덕궁 후원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동이가 이 근처에서 촬여을 했나 보네요. 동이를 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오래전 드라마라서 그런지 포포존 관리가 좀 허술해 보입니다. 



경주는 주요 유적지를 모두 걸어서 볼 수 있습니다. 포석정과 불국사만 포기한다면 남자라면 아침부터 저녁이 되기 전 까지 다 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좀 피곤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전거 대여해서 돌아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월성에서 내려오면 바로 앞에 안압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궁과 월지라고 써 있네요.
???? 무인 매표소에 있는 여자분에게 물어보니 여기가 맞다고 하네요.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아니 최근까지 안압지라고 했는데 이름이 바뀌었네요. 사실 이름이 바뀐것이 아니라 안압지는 연못 이름이고 정식 명칭은 동궁과 월지입니다. 그 안에 호수 안압지가 있는 것이죠. 




제가 버스 터미널 부터 시작했으니 약 3~4km를 걸었습니다. 분황사까지 갔다가 서울로 올라왔으니 약 10km를 걸은 셈이네요.

 

안압지 입장료는 대인 1,500원 청소년 군인 700원 어린이 500원입니다. 싸다면 싸고 비싸다면 비쌉니다. 
안압지(동궁과 월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보고 25년 만에 와 봤습니다. 그때의 기억이란 비오는 날 안압지를 휙하고 둘러보고 다시 관광버스를 탄 기억밖에 없습니다. 이 안압지는 낮 보다는 밤이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유리같은 흔들리지 않는 호수가 큰 거울이 되어서 안압지에 있는 정자를 그대로 담기 때문입니다.

입구에서도 밤이 더 예쁘다고 소개를 해주시는데 시간이 있어야말아죠. 저녁에 갈 곳이 있어서 낮에 잠시 들렸습니다. 


안압지를 품고 있는 동궁은 세자가 묶었던 궁궐입니다. 월성 밖에 지어져서 동궁이라고 불리웠죠.
신라가 멸망한 후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이 동궁과 월지(안압지)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그 건물들은 바로 생기를 잃게 되는데 그걸 보면 건축도 하나의 유기체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입구에는 큰 정자가 있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게 안압지네요. 안압지는 특이하게도 호안이 돌로 되어 있는데요. 인공연못임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안압지의 뜻은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합니다.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이름인데 옛 명성이 사라지고 인공연못에 기러기와 오리만 있다고 안압지라고 했어요. 



화려한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남았다.  세상 모든 권력은 영원하지 않겠죠. 꽃이 피면 지듯 신라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있는 저 건물들은 후대에 다시 복원된 건물들 같습니다. 신라시대에는 팔짝 지붕이 없었거든요.  

저게 잘못 알고 있었네요. 검색을 해보니 통일신라시대 부터인가 신라시대에도 팔작 지붕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전수되었다고하네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안압지 연못의 인공섬에 산도 만들고 꽃도 심고 진귀한 동물도 키웠다고 하네요. 거대한 어항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아 있는 주춧돌로 보아 총 26채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동궁에는 현재 3개의 전각만 복원해 놓았습니다. 서양의 돌로 만든 건축 문화 때문에 2차대전이라는 그 난리를 겪고도 많은 부분 현재 남아 있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나무로 된 건물을 지어서 화재에 아주 취약했고 그래서 화마에 다 소실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과 침략이 있었습니까?

왜놈들이 진군하면서 조롱하듯 많은 문화재를 불태우고 몽골족이 또 태우고 아무튼 침략은 엄청나게 당했던 나라입니다. 그러면서 착해서 그렇다는 드립을 하지만 힘이 없는 나라의 한계인거지 우리도 힘이 쌜 때는 저 먼리까지 땅을 넓히기도 했잖아요. 몽골의 역사로 보면 광개도대왕은 침략자로 보여질 것입니다. 


안압지는 아주 뛰어난 인공연못으로 외국 사진이 올 때 잔치를 해서 대접을 해주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전각에 가보면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안압지를 발굴하면서 나온 유물과 예전 안압지를 볼 수 있는 디오라마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궁궐답게 으리으리 했네요





이 안압지에서는 오래된 목선도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시대의 배의 모양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목선은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압지는 재미있게도 굴곡이 아주 울긋불긋하게 펴 있습니다. 경복궁 경회루는 사각형 형태이고 대부분의 조선시대 인공 연못들이 사각형태이거나 원형인데 반해 이 안압지는 웨이브진 호안이 있었습니다. 이건 필시 뛰어난 디자인 감각입니다.

이 굴곡들이 이 안압지를 푸근하고 혹은 흥미롭고 지루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주 작은 곳도 있는데 금붕어나 붕어를 키우면 그 노는 모습을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정겹습니다.  큰 수조 같은 느낌이 들다가도 

이쪽을 보면 이렇게 바다와 같은 넓은 느낌이 듭니다. 
이 안압지는 연꽃이 가득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꽃을 볼 수 있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고 일부분입니다. 아마 연꽃으로 가득 채웠다가는 수 많은 사진가들에게 돌팔매질을 받을걸요. 뛰어난 반영샷을 연꽃이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 사실, 이 안압지는 밤이 더 아름다운 곳이고 사진 촬영 명소가 되어서 낮 보다는 밤에 참 많이들 옵니다.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다 도는데는 약 30분 정도면 다 돌 수 있습니다. 조금 느슨하고 담소를 하면 한 1,2시간 정도를 둘러볼 수 있고요. 



입수구는 안압지의 물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백제의 기술이 들어간 기술입니다. 백제는 뛰어난 조경기술이 있었습니다. 
입수구는 거북이를 음각한 것 같은 두 개의 수조가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물에 섞인 자갈이나 모래를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깨끗한 물만 연못에 들어가게 되는데 한 마디로 이 입수구가 필터 역할을 했네요

들어간 물은 안압지의 배수구를 통해서 나가는데 3개의 구멍으로 된 배수구에 나무 마개를 씌워서 배출되는 물의 양을 조절했습니다. 상당히 과학적이네요

이 안압지에서 녹색의 물을 보니 옛 고등학교 때의 수학여행의 기억이 피어나네요. 그때도 날이 흐렸고 아니 비까지 내렸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20년이 지나서 또 찾았던 날도 날이 흐렸습니다. 그래서 더 상념에 잠기게 되네요.  옛 명성은 사라지고 쓸쓸함만 남은 안압지, 지금은 야간 조명으로 밤에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