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리뷰/영화창고

프랑스 중학교 교실의 소우주를 담은 영화 '클래스'

by 썬도그 2012. 11. 12.
반응형



중학생이라는 단어는 너무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싫은 이유는 가장 길들여지지 않는 아이들이 중학생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은 몸이 작기 떄문에 항상 부모님이나 선생님등의 어른에게 기대는 모습이 있고 아이가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죠. 반면 고등학생은 작은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성숙한 모습과 뭘 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 사리판단을 어느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학생은 야생의 느낌이 강합니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짐승과 같은 나이. 물론 이 선입견은 제 암울했던 중학교 시절과 링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폭력을 행사하는 준 조폭같은 놈들하고 1년을 지냈습니다.
깡패학교라고 소문한 곳에서 깡패들과 한 학교를 다녔는데 중 2때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중학생들이 가장 버릇없고 시끄럽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넘치는 에너지를 다스릴 줄 모르는 모습에서 기인 한 것이지만 점잖은 것을 추구하고 시스템 안에서 살길 바라는 어른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모습으로 보게 되는 것이 중학생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긴 중학생. 과연 이런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발광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모습이 비단 한국만의 모습일까요?


프랑스 중학교 교실을 다큐로 담은 듯한 영화 클래스

요즘은 '칸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받아도 국내에 개봉도 안 합니다. 해도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개봉하고 사라지죠. 이 영화도 그랬습니다. 2008년 그 유명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국내에 수입도 되지 않다가 뒤는게 2010년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개봉했다가 사라졌습니다. 

한 눈 팔면 개봉한지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황금종려상이라는 상의 권위답게 이 영화 '클래스'는 뛰어난 이야기와 학교라는 소우주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한 중학교 교실의 한 학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사립은 아니고 공립인듯 한데 공립도 변두리나 이민 계층이 많이 사는 지역인듯 합니다.
이 프랑스 중학교에서 프랑스어 선생님인 마랭과 아이들의 공방전(?)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다큐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음껏 이야기 하라고 지시한 후 그냥 옆에서 카메라로 그 수업광경을 촬영한 듯한 모습입니다. 이 영화를 지난 주말 EBS에서 봤습니다. 


시끄럽고 복잡스러운 중학교 교실 풍경은 비슷하나 한국과 너무 다른 프랑스 교실

중학교 교실은 원래 시끄럽습니다. 프랑스 교실이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다릅니다. 똑같이 시끄러운데 한국은 소음이고 프랑스 교실은 소음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수 많은 질문이 오고갑니다.

선생님 저요! 저요! 
영화는 엄청난 대사량에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중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손을 들고 질문을 하거나 언쟁이나 논쟁을 선생님과 주고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이 짜증내 하고 다 손 내려.. 시끄러 너! 라고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이 마랭 선생님은 놀라울정도의 칙참함과 이성적 판단으로 모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율합니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듯 합니다. 
전 이 엄청난 질문들의 연속 속에서 한국 교실을 생각해 봤습니다.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시끄러울때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 옆 짝꿍과 떠드는 것이고 조용할 떄는 모두 자는 것이죠. 선생님들에게는 어떤 것이 좋을까요? 열정이 없거나 그게 일상인 선생님들은 잠을 자는 모습이 선생님에게 덜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 오히려 떠들지 말고 자라고 하겠죠.

저는 이런 교실 풍경의 차이가 바로 우리의 인성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의견에 따지고 들고 선생님이 틀릴 수도 있지 않냐는 식으로 어떻게 보면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질문을 과연 한국의 선생님들이 받아 줄 수 있을까요?


어떤 질문도 허용하는 마랭 선생님. 그의 모습을 보면 학생들의 수없는 질문에 포위되어서 쩔쩔매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열정적으로 아이들 하나하나를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있고 그런 모습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손을 들고 질문권을 타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시끄럽지만 질서가 있는 프랑스 교실을 봅니다. 물론 반 친구들끼리 수업시간에 대놓고 비난하고 힐난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그 모습을 선생님이 잘 중재해주고 항상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프랑스 선생님들도 이런 힘든 아이들 보다는 중국에서 이민온 동양인 학생을 좋아합니다. 교무실에서 회의할때면 꼭 항상 수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에게 도전하거나 막말하지 않고 조용하고 고분고분하고 예의가 있는 중국에서 이민온 웨이를 극찬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좋다는 것일 뿐 다른 학생들을 차별하거나 혹은 웨이만을 편애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편애가 어느정도 인정 받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라고요? 예를 들어보죠.
조만간 고등학교 입구에는 서울대 입학 학생의 이름을 단 플랜카드를 걸어놓고 연고대 몇명 입학시켰다고 걸어 놓을 것입니다. 그게 편애가 아니라면 뭡니까? 물론 사립은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 학교를 세일즈 해야 먹고 살고 유명세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뺑뺑이로 가는 다른 공립 학교나 사립학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그 서울대 입학 축하하는 플랜카드로 인해서 다른 학생들이 상처 받는 것은 생각 안해보시나요?

어디 이 뿐입니까? 공부잘하면 뭐든지 용서됩니다. 같이 담배피다가 걸려도 모범생이고 전교등수에서 노는 학생은 쉽게 봐주지 않나요? 물론 모든 학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향이 없다고도 할 수도 없습니다. 


폭발한 마랭 선생님. 선생님들끼리 서로 견제하고 비판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시끄럽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 학생들은 네이션컵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단점을 공격을 합니다. 그럴때 마다 모든 말을 경청하다가 다른 친구를 예의에서 어긋나면 바로 마랭 선생님이 지적하고 주의를 줍니다. 

그러나 술레만이라는 전학생은 마랭의 인내심을 넘어서 버립니다. 술레이만이 선생님인 마랭에게 반말을 합니다.
이에 마랭 선생님은 교장실로 술레만을 보내버리게 되고 얼마 후 징계위원회가 열립니다. 징계위원회에서 술레이만의 퇴학여부를 결정하는데 이미 여러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터라 한번 더 퇴학당하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합니다.

술레만 문제로 인해 마랭 선생님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징계위원회 교사이기도 합니다.
이에 다른 선생님이 마랭 선생님을 질타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징계위에 회부한 학생을 직접 징계 판단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과 이 술레만이 폭발한 이유가  마랭 선생님이 폭발하면서 여학생에게 매춘부 같다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교사로써는 해서 안되는 말을 한 것이죠. 이 것을 안 교장선생님은 그 매춘부 말을 기록에 남깁니다. 

한국이었으면 어땠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이런 일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토론과 회의 보다는 윗 사람의 판단에 거수기 역활을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들의 회의에서도 교실 처럼 복종과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 같네요. 물론 의견 제시는 하지만 항상 권위자의 결정으로 결론이나죠. 전 징계위를 보면서 놀랬던 것은 그 징계위에 반을 대표한 중학생들이 같이 참석한다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민주주의를 배우는 프랑스 학생들과 시끄럽기만 한 한국

제 중학교 시절 기억과 아이들에게 들어본 요즘 학교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다른것이 있다면 한 반에 60명에서 30명 정도로 줄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권위가 존재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 클래스는 다양한 의견을 하나하나 무시하지 않고 다 들어주면서 조율을 하는 시끄러운 풍경을 잘 담고 있습니다. 프랑스 중학생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사건 사고나 학생들의 방종이나 일탈 행위를 어떻게 다스리냐는 것이죠.  끊임없이 회의와 토론을 하는 프랑스.  하지만 과연 한국은 어떨까요? 회초리 들고 패면 된다는 식이 다수의 의견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영화가 끌렸던 것은 보면서 한국의 교실을 계속 비교 했기 때문입니다. 현상은 똑 같으나 그걸 처리하는 시스템이 너무 다른 두 나라의 풍경. 어떤 것이 더 좋을까요? 관용의 나라 프랑스와 관용 보다는 눈눈이이가 가장 바르다고 생각하는 한국. 


영화는 결론을 내지 않고 흐트러진 교실의 책상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아이들은 1학기동안 쓴 자화상이라는 작문숙제를 제출을 하죠. 과연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화상을 어떻게 그렸을까요? 




어차피 학교라는 시스템은  사회적 약속을 배우는 곳입니다. 내가 너를 때리지 않을테니 너도 나를 때리자 마라는 사회 계약을 배우는 곳입니다. 따라서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시민으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그런 시민으로 태어나는 것도 있지만 온갖 부정과 부패한 행동도 학교에서 미리 경험한 후에 사회에서 부도덕함을 불쑥 만나도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도 배웁니다.  제가 한국 교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 같네요.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프랑스식의 관용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을 하던 끊임없이 대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교실 문패 하나 바꾸는 것도 많은 사람과 함께 회의하고 결론을 내서 결정했으면 합니다. 폭력이 있는 공간에 끊임없는 대화가 파고 들었으면 하네요

영화는 엄청난 대사량에 얼얼할 정도입니다. 프랑스 중학교 교실을 엿본 느낌 그리고 그 교실이 한국과 너무 다른 모습 속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칠려면 다그치고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편견이 아닐까요? 여기 프랑스 교실의 사건 해결 방식을 보시고 그게 대안이 될 수 있다면 사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반대로 프랑스 교사들이 한국이 교실에서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웠으면 하네요. 

중요한 것은 생기입니다. 무례한 듯 엄청난 질문과 난처한 질문. 예를 들어 게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프랑스 교실은 생기가 있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줄 압니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뭐가 부족한지 압니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들은 뭘 모르는지 조차 모르고 수업시간에 자고 있는 것 아닐까요? 밤에 보습학원에서 수업을 배우고 교실에서 자는 것이 한국 중학교 교실의 풍경이라고 조카가 말해주던데요.  참 갑갑하기만 합니다.

이 클래스는 실제로 많은 교사분들이 봤다고 하는데요. 한국 학교도 좀 더 많이 달라졌으면 합니다.  산송장들이 넘치는 교실을 걷어차 버렸으면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