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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미국의 왕따 문제를 다룬 다큐 '불리'를 보고 불 같은 분노가 치밀다

by 썬도그 201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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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학생이 친구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그 사건에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혔죠. 
그 사건 말고라도 많은 학생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경찰과 교육청과 정부는 대책 마련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리 있나요? 피해자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왜 그런 왕따가 생기는지 제대로 된 판단도 인식도 못하는데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겠어요.

왕따! 이 단어를 알게 된게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외삼촌과 왕따 문제를 두고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고리타분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분명히 70.80년대는 왕따문제가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70.80년대에 왕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 있었습니다. 80년대 초,중,고를 다닌 저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당시에도 왕따는 있었습니다. 

당시는 왕따라는 단어도 없었고 왕따라고 인식도 되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랑 친했던 그 친구는 왕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같은 동네 친구였는데 항상 말이 없는 내성적이고 운동도 둔한 친구였죠. 공부도 썩 잘하는 친구는 아니였습니다.

왕따의 조건을 고루 갖춘 친구였죠. 내성적 성격에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운동신경도 둔한 친구. 그 친구의 유일한 취미는 만화그리기였습니다. 갱지를 낀 파일철을 가지고 다니면서 볼펜으로 4컷 만화 같이 줄을 켜 가면서 만화를 그렸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모두 이상하다면서 외면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중,고때 제 성격은 내성적이었고 그런 내성적인 친구가 친근했습니다. 항상 외진 곳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다가가서 그 만화를 들여다 보면서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만화 정말 재미없었죠. 솔직히 재미있지도 않고요. 
그러나 그 친구가 좋았던 것은 항상 자신에게 관심가져주는 친구들에게 잘 했습니다. 활달하지 못하고 운동을 못해서 손가락질을 받기 했지만 운동 못하는 게 그 친구 잘못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짬뽕이나 야구, 축구 못하면 쉽게 외면 했습니다. 그런 친구들 많이 있잖아요. 운동도 공부도 그렇다고 잘생긴 외모도 아니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친구들이요

하지만 그게 그 친구 잘못인가요? 특히 생긴것 지적질 하면서 배척하는 친구들은 오히려 제가 외면했습니다.
저도 내성적이라서 이런 친구들과 더 친하게 지냈고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 갈 때 까지 가장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

이렇게 80년대 까지만 해도 왕따 문화는 심하지 않았습니다. 왕따 인자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런 친구들 끼리 뭉치기도 하고 서로 챙겨주기도 하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죠. 따져보면 왕따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왕따라고 할 만한 친구도 거의 없었습니다.  운동못하면 '깍두기'라고 해서 핸드캡을 적용해서 '다방구'나 '짬뽕' 같은 손 야구를 같이 했습니다. 

지금이라면 운동 못하면 깍두기고 뭐고 그냥 구석에 찌그러져 있거나 배척했겠죠
지금 이 깍두기 문화가 사라졌습니다.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이 그 친구의 노력 부족이 아닌 선천적인 것이라면 쉽게 받아들였죠. 아니 선천적이 아닌 게으름이라고 해도 받아줬습니다. 어떻게든 함께 놀려고 했고 함께 놀기 힘든 상황이면 다 같이 못 노는것이 공평하다면서 파토를 낼 지언정 누구를 배척하고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아이들이 이사를 가고 새로 이사를 오는데 새로온 뉴비들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새로 이사온 아이들이 있으면 연장자인 저에게 인사를 시키고 전 그 뉴비인 어린 동생이 새로운 동네에서 배척 당하지 않게 세심하게 지켜봤습니다. 이게 상식이고 공동체 정신 아닌가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서면서 달라졌습니다.
90년대 이지메라는 생소한 단어가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조금만 다르면 배척하고 외면하는 문화인 이지메가 있다고 해외토픽에서 소개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다마고치 처럼 국내에 수입될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한국도 왕따문화가 수입되고 현재는 일본 못지 않는 왕따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왕따문제는 한국과 일본 문제가 아닌 태평양 건너 미국의 문제가 됩니다.


EBS가 해마다 여름 끝자락에 하는 다큐 잔치인 EIDF의 개막작이자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된 다큐 '불리'를 방금 봤습니다. 
이 다큐는 미국내의 집단 따돌림인 '왕따'문제를 직설적으로 담은 다큐입니다.  이 불리가 세상에 알려지자 미국은 크게 반응했습니다. 놀랍다는 미국인들도 있고 너무 과장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불리는 과장이 아닌 실제있었던 왕따 문제를 다룬 다큐입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1,300만명의 학생들이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다큐는 시작하자 타일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6mm카메라인지 비디오카메라인지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타일러가 뛰어노는 모습이 나옵니다. 너무나 귀여운 꼬마아이인 타일러의 뛰어놀지만 커가면서 타일러는 내성적으로 변합니다.

왕따의 한 인자인 내성적 성격이라는 먹구름이 낍니다. 
그리고 시끄럽운 것과 사람이 북적이는 것을 싫어하는 타일러를 보면서 타일러의 부모는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다가는 외톨이가 되겠다는 직감을 하게 되죠. 

타일러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운동신경이 떨어진는 것을 발견한 친구들이 더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타일러는 울기 시작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울기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울음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때 집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합니다. 

92년에 태어나서 2009년 17세의 나이로 타일러는 사망합니다. 다큐는 이런 타일러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다큐 불리는 5개주의 5명의 왕따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담은 다큐입니다. 타일러와 같은 왕따 문제로 자살을 한 학생이 2명이고 현재 왕따 문제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이 나옵니다

그중 한 명이 40주가 아닌 26주만에 태어나서 기형을 약간 가진 12살의 알렉스가 등장합니다. 알렉스는 생김새가 붕어 같이 생겨서 학생들에게 괴롬힘을 당합니다. 스쿨버스에서도 다큐의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도 대놓고 학생들은 괴롭힙니다. 매일 같이 학생들에게 괴롬힘을 당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깁니다.

혼자 스쿨버스에 앉아있다가 다른 학생이 옆에 타서 알렉스가 말을 걸면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겠다는 섬뜩한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나 봅니다. 동생은 그런 오빠가 창피하고 알렉스 오빠 때문에 자신도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을 합니다. 

또 한 명의 학생은 켈비라는 여학생인데 보수적인 기독교 색채가 강한 도시의 학교를 다니는데 캘비가 동성애자라는 이유 때문에 왕따를 당합니다. 켈비는 말합니다. 학생들의 괴롭힘을 넘어서 선생님들 마져  켈비를 동성애자라고 같이 괴롭힙니다. 

예를들어 남학생 이름을 부르고 여학생 이름을 부른 후에 맨 마지막에 남학생도 여학생도 아닌 켈비를 부르는 식으로 대우를 하죠. 전 이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선생님들을 생각했습니다. 

과연 한국의 선생님들은 한국의 왕따 문제를 해결하고 막아주는 보호막이 아닌 가해학생과 같은 가해자가 아닐까 하고요. 
다큐는 선생님들의 항변을 담고 있고 교육당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긴 합니다만 그 이야기가 너무나 무책임해 보입니다. 




켈비와 같은 학생들이 학교와 경찰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고백하지만 학교는 자기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할 뿐이고 경찰은  아이들이 다 그렇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이런 인식의 부재 속에 켈비나 알렉스 같은 학생은 왕따라는 폭력에 노출되어서 괴로움을 계속 이어갑니다. 

켈비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3번의 자실기도를 합니다. 이런 교육당국과 경찰의 안이한 대응속에 왕따 학생들이 권총자살을 하면서 자살을 합니다. 예전엔도 왕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만 국한된 왕따였죠

지금은 다릅니다. 학교에서 실컷 왕따를 당하고도 집에서까지 문자메세지와 인터넷으로 협박을 당합니다. 대구중학교 학생도 학교를 넘어서 집에서 까지 문자로 게임 아이템 앵벌이 하라고 협박을 당했죠. 예전에도 왕따가 있었지만 하루 몇시간의 고통이었다면 지금은 잠 자는 시간 빼고 온라인과 문자메세지로 계속 협박을 당하죠. 하지만 교육당국과 경찰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다큐는 이런 안이한 어른들의 대응을 그대로 담습니다. 
그리고 타일러의 죽음을 계기로 전 미국의 같은 문제로 고민중인 학생과 학부모들의 모임과 목소리를 소개합니다. 
타일러의 부모님은 왕따문제를 해결하자며 모임을 만들고 사회의 각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왕따 문제로 고민중인 학생과 학부모들이 뭉치기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교육당국에 항의를 합니다.



너무나 비슷합니다. 태평양 건너의 미국이나 한국의 왕따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왕따문제를 왕따 학생의 문제로 치부하다가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그때서야 호들갑을 떱니다. 그때서야 강력한 법의 제지를 가하는데 이미 사건이 크게 터진 후에 움직이고 항상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사후약방문으로 해결합니다. 

그리고 학교와 경찰의 대책의 한계를 살짝 담습니다.
솔직히 왕따문제는 학교 선생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보통 왕따문제가 발생하면 가해자 학생의 부모들이 가해자 아들을 패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고 피해자 학생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된게  가해자 부모들이 맞을만 했으니가 맞고 왕따 당할만 하니까 왕따 당한다고 윽박 지릅니다.

얼마 전 고대 여학생이 M.T에서 성추행을 당했는데 그 가해자 고대 의대생의 어머니가 여학생을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퍼트리다가 같이 구속이 되었죠. 

왕따문제는 학생들의 문제이지만 근본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자 건전성입니다. 상식이 있는 사회는 가해자 학생들을 준엄하게 단죄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면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해야 하는데 요즘 보면 가해자 학생이나 부모가 더 설치고 당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 사회에 일조한 게 우리들 아닐까요? 왕따문제는 경찰과 교육당국 이전에 사회가 상식을 제대로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 상식이 무너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또한 요즘 칼부림 사건의 이면도 들여다보면 세상 왕따들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나 찌르는 데 그 사람들을 우리 사회가 찾아서 보듬거나 말을 걸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죠

왕따 학생들이 괴롭다고 할 때 세상은 그 괴로움에서 나오는 비명소리를 외면했고 그 외면속에 가해자들의 린치는 계속 되었습니다. 


모두가 문제입니다. 왕따 문제는 모두가 가해자입니다.
우리 사회가 방관했고 상식이 무너진 사회에서 기형적인 인성을 가졌지만 자신의 인성이 기형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가해자를 우리 사회가 키운 것이죠. 또한 불의에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가해자가 더 날뛰는 것도 있습니다. 

공원에서 담배 피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어른들. 학생이 구석진 곳에서 삥을 뜯겨도 외면하는 사람들. 법도 문제죠. 그런 학생폭력에 지적을 하면 지적한 어른과 가해자 학생 동시에 처벌하는 법의 느슨함도 문제입니다. 괜히 지적했다가 같이 경찰서에 가는 법체계도 문제죠. 

다큐 '불리'는 5명의 왕따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많은 미국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각성을 했고 왕따문제를 교육당국이나 경찰에 맡기지 말고 우리가 나서자고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불리(Bully)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 한국의 불리들은 얼마나 많고 그 불리들을 우리는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나요? 학교 폭력을 아이들의 장난질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요?

학교 선생님들 가장 큰 역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별거 아닌 일이지만 피해 학생들은 자살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구 중학생도 그렇고 그냥 죽지는 않습니다. 항상 학교 선생님이나 주변인들에게 고통을 호소하죠. 그러나 그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애써서 별거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요?

집단 괴롭힘은 근본은 다양성을 이해 못하고 린치를 가하는 세상의 추악함이 만든 풍경입니다. 상식적인 사람이 많으면 조그마한 폭력에도 단호하게 NO! 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른들이 NO!라고 하기 보다는 그 시절은 다 그런거야 식으로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같이 폭력학생의 악행을 학생기록부에 주홍글씨로 쓰는게 대안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 왜 폭력이 나쁜 것인지 피해자 입장을 가해자 학생에게 전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교화를 시도하는 것이 좀 더 바르지 않을까요? 항상 보면 우리는 가해자를 교화하기 보다는 감옥에 가두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은 왕따문제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생각하고 불리 프로젝트를 가동했습니다. 과연 한국은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나요?
혹 수학여행에서 관광버스가 전복해서 많은 학생들이 다치자 수학여행을 금지한 그 방식으로 왕따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전국의 아파트 옥상문을 잠그라고 하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닐까요?

아니면 가해학생들을 교화하기 보다는 주홍글씨를 써서 평생 그 과오의 꼬리표를 달고 살게 하면서 악의 세계에서 살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불리를 보면서 한국을 돌아보니 한숨만 나옵니다. 다큐속 알렉스나 켈비는 그나마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라도 하지 우리 사회의 왕따 학생들은 어디에 하소연을 합니까?  왕따문제!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집으로 향하면서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한 3살이나 되는 듯한 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버스가 왔다고 뛰더군요. 그 아이를 보면서 저 아이는 커서 왕따로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버스 정류장 옆에는 중학생이나 된 듯한 여학생 둘이 전단지 나눠주는 알바를 하더군요.  평소에 전단지 잘 안 받는데 저에게 줄려고 하지 않았지만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집에가서 버릴 전단지이지만 비가 오는데 전단지 돌리는 그 모습이 측은스럽더군요. 

아이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바르고 밝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도 있고요. 과연 우리는 그 권리를 지켜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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